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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 권혁웅 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권혁웅 견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포장마차 가본 게 언제인가 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견디고 있을 것이다 크기에 빗댄다면 대합탕 옆에 놓인 소줏잔 같을 것이다 방점처럼, 사랑하는 이 옆에서 그이를 중요한 사람으로 만드는 바로 그 마음처럼 참이슬은 조각난 조개의 조변석개를 안타까워할 것이다 천막을 들추고 들어가는 들큼한 취객의 등이여, 당신도 오래 견딘 것인가 소주병의 푸른빛이 비상구로 보이는가 옆을 힐끗거리며 나는 일편담심 오리지널이야, 프레쉬라니, 저렇게 푸르다니, 풋, 이러면서 그리움에도 등급을 매기는 나라가 저 새벽의 천변에는 희미하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언제든 찾아갈 수 있지만 혼자서는 끝내 가지 않을 혼자라서 끝내 갈 수 없는 나라가 저.. 2019. 7. 13.
저녁 스며드네 - 허수경 저녁 스며드네 허수경 ​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물방울은 동그르 꽃 밑에 꽃 연한 살 밑에 먼 곳에서 벗들은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고 저녁 스며드네, ​ 한때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의 모든 주막이 일제히 문을 열어 마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저녁을 거두어들이는 듯했는데, ​ 지금 우리는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네 양념장 밑에 잦아든 살은 순하고 씹히는 풋고추는 섬덕섬덕하고 저녁 스며드네, ​ 마음 어느 동그라미 하나가 아주 어진 안개처럼 슬근슬근 저를 풀어놓는 것처럼 이제 우리를 풀어 스며드는 저녁을 그렇게 동그랗게 안아주는데, ​ 어느 벗은 아들을 잃고 어느 벗은 집을 잃고 어느 벗은 다 잃고도 살아남아 고기를 굽네 불 옆에 앉아 젓가락으로 살점을 집어 불 위로 땀을 흘리.. 2019. 7. 6.
알 수 없어요 - 황인숙 알 수 없어요 황인숙 내가 멍하니 있으면 누군가 묻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고 내가 생각에 빠져 있으면 누군가 묻는다 왜 그리 멍하니 있느냐고 거미줄처럼 얽힌 복도를 헤매다 보니 바다, 바닷가를 헤매다 보니 내 좁은 방 * tirol's thought '짐작과는 다른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딱히 구분하기가 애매한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멍하니 있는 것'과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은 얼마나 다른가 바다와 내 좁은 방은 얼마나 멀리있나 거미줄처럼 얽힌 복도를 헤매거나 눈을 잠시 감았다 뜨거나 천천히 고개를 뒷쪽으로 돌리거나 그러면 거기 바다가 있거나 들판이 있거나 하늘이 있거나 하지는 않을까 거미줄처럼 얽힌 행간을 헤매다 보니 바다, 바닷가를 헤매다 보니 내 좁은 방 여기 2019. 6. 29.
춘추 - 김광규 춘추 (春秋) 김광규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 한 줄 쓴 다음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 병술년 봄을 보냈다 힐끗 들여다본 아내는 허튼소리 말라는 눈치였다 물난리에 온 나라 시달리고 한 달 가까이 열대야 지새며 기나긴 여름 보내고 어느새 가을이 깊어갈 무렵 겨우 한 줄 더 보탰다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 tirol's thought 3연 13행의 시 속에 봄부터 가을까지 세개의 계절이 들어있다. 망설임과 아내의 눈치와 물난리와 열대야를 거쳐 봄에서 가을로 꽃 피는 소리에서 잎 지는 소리로 잎 지는 소리와 다시 꽃피는 소리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2019. 6. 22.
산산조각 - 정호승 산산조각 정호승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 tirol's thought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내게 부처님이 우연을 가장하여 보내 주신 시가 아닐까.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고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머리로 몰랐던 건 아닌데, 그런데 머리로만 아는 걸 안다고 해야할까 불쌍한 내 머리 부서져야하리 산산.. 2019. 6. 8.
오늘, 쉰이 되었다 - 이면우 오늘, 쉰이 되었다 이면우 서른 전, 꼭 되짚어보겠다고 붉은 줄만 긋고 영영 덮어버린 책들에게 사죄한다 겉 핥고 아는 체했던 모든 책의 저자에게 사죄한다 마흔 전, 무슨 일로 다투다 속맘으론 낼, 모레쯤 화해해야지 작정하고 부러 큰 소리로 옳다고 우기던 일 아프다 세상에 풀지 못한 응어리가 아프다 쉰 전, 늦게 둔 아이를 내가 키운다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그 어린 게 날 부축하며 온 길이다 아이가 이 구절을 마음으로 읽을 때쯤이면 난 눈썹 끝 물방울 같은 게 되어 있을 게다 오늘 아침, 쉰이 되었다, 라고 두 번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서늘한 방에 앉았다가 무릎 한번 탁 치고 빙긋이 혼자 웃었다 이제부턴 사람을 만나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따끈한 국밥 한그릇씩 꼭 대접해야겠다고, 그리고 쓸쓸한 가운데 즐거움이.. 2019. 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