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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5

거룩한 식사 - 황지우 거룩한 식사 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 tirol's thought 내 힘으로 숟가락을 들 수 있게 된 때부터 오늘까지 밥을 안먹고 보낸 날이 몇 일이나 될까 숟가락을 들어 몸에 한세상 떠넣어준 그 많은 날들 중에 내가 마주 앉았던 .. 2024. 2. 23.
11월의 나무 - 황지우 11월의 나무 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 tirol's thought 겨.. 2022. 11. 18.
길 - 황지우 길 황지우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보면은 조선팔도, 모든 명당은 초소다 한려수도, 내항선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 tirol's thought 키에르케고르가 그랬다던가, 인생이란 앞을 보고 나아가는 것이지만 뒤를 돌아보며 이해되는 것이라고. 앞에 길이 없어도 나아가야하는 게 생이고 그렇게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싶어지는 게 생인가? 거품 같은 길, 거품의 길 굴욕을 두려워하지 말자. 내가 내린 닻이, 내 덫이 될지니. 나아가야 한다. 살아가야 한다.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 2007. 2. 12.
티롤의 네번째 포임레러 [2002.11.25. WED. 티롤의 네번째 포임 레러~] ◈ tirol's greeting 감기는 좀 나은 듯 합니다. 다 나았다고는 말 못하겠습니다. 다 나은 줄 알고 있다가 지난 주말에 뒤통수 한대 맞았습니다. 일요일 새벽에 터져나오는 기침때문에 자다말고 깨서 한참을 앉아있었더랬습니다. 꺼졌다고 방심말고 조심해야할 게 담배불이나 지나간 사랑만은 아닌가 봅니다. 오늘 고른 시는 나무에 관한 시입니다. "타는 갈망이 나무를 푸르게, 푸르게 한다"는 구절 때문에 골랐습니다. 무엇이 당신을 푸르게 하나요? 무엇이 나를 푸르게 해줄까요? =-=-=-=-=-=-=-=-=-=-=-=-=-=-=-=-=-=-=-=-=-= ◈ today's poem 나무는 단단하다 황지우 사시사철 나무는 물질이다 나무는 단단하고 .. 2002. 11. 27.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을 뜯어주게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거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닥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2001. 9.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