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663

별을 보며 - 이성선 별을 보며 이성선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tirol's thought 몇 주 전 주일설교 시간에 전도사님께서 이 시를 읽어주셨다. 낭송은 묵독과 달라서 CM송의 한 구절처럼 귀에 확 와닿는 구절이 없으면 곧 잊혀지기 쉬운데 이 시의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라는 부분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맥락없이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로 시작하는 신경림 시인의 .. 2019. 10. 4.
2019년 9월 15일 2019. 9. 15.
내가 바라보는 - 이승희 내가 바라보는 이승희 처마 밑에 버려진 캔 맥주 깡통, 비 오는 날이면 밤새 목탁 소리로 울었다. 비워지고 버려져서 그렇게 맑게 울고 있다니. 버려진 감자 한 알 감나무 아래서 반쯤 썩어 곰팡이 피우다가 흙의 내부에 쓸쓸한 마음 전하더니 어느날, 그 자리에서 흰 꽃을 피웠다. 그렇게 버려진 것들의 쓸쓸함이 한 세상을 끌어가고 있다. * tirol's thought 클라이맥스로만 이루어진 노래는 노래가 아니듯 일년 내내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다면' 사람들은 그런 얘길 하지도 않겠지. 버려진 것, 눈에 띄지 않는 것, 잊혀진 것들의 쓸쓸함이 끌어가는 한 세상.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던 어느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울고 있는 그들의 눈물은 그들만의 것일.. 2019. 9. 14.
높새바람같이는 - 이영광 높새바람같이는 이영광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내겐 지금 높새바람같이는 잘 걷지 못하는 몸이 하나 있고, 높새바람같이는 살아지지 않는 마음이 하나 있고 문질러도 피 흐르지 않는 생이 하나 있네 이것은 재가 되어가는 파국의 용사들 여전히 전장에 버려진 짐승 같은 진심들 당신은 끝내 치유되지 않고 내 안에서 꼿꼿이 죽어가지만,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꾸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 tirol's thought '높새바람'은 동해안에서 태백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부는 바람이다. 늦봄부터 초여름 사이에 부는데 동쪽 산을 타고 오르며 품고 있던 수증기를 거의 비로 내려버려 서쪽 산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은 온도가 .. 2019. 8. 31.
處暑 - 문태준 처서 문태준 얻어온 개가 울타리 아래 땅 그늘을 파댔다 짐승이 집에 맞지 않는다 싶어 낮에 다른 집에 주었다 볕에 널어두었던 고추를 걷고 양철로 덮었는데 밤이 되니 이슬이 졌다 방충망으로는 여치와 풀벌레가 딱 붙어서 문설주처럼 꿈적대지 않는다 가을이 오는가, 삽짝까지 심어둔 옥수숫대엔 그림자가 깊다 갈색으로 말라가는 옥수수 수염을 타고 들어간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나온다 가을이 오는가, 감나무는 감을 달고 이파리 까칠하다 나무에게도 제 몸 빚어 자식을 낳는 일 그런 성싶다 지게가 집 쪽으로 받쳐 있으면 집을 더메고 간다기에 달 점점 차가워지는 밤 지게를 산쪽으로 받친다 이름은 모르나 귀익은 산새소리 알은체 별처럼 시끄럽다 * tirol's thought 어제가 처서. "24절기의 14번째로 태양 .. 2019. 8. 24.
두부 - 고영민 두부 고영민 저녁은 어디에서 오나 두부가 엉기듯 갓 만든 저녁은 살이 부드럽고 아직 따뜻하고 종일 불려놓은 시간을 맷돌에 곱게 갈아 끓여 베보자기에 걸러 짠 살며시 누름돌을 올려놓은 이 초저녁은 순두부처럼 후룩후룩 웃물과 함께 숟가락으로 떠먹어도 좋을 듯한데 저녁이 오는 것은 두부가 오는 것 오늘도 어스름 녘 딸랑딸랑 두부장수 종소리가 들리고 두부를 사러 가는 소년이 있고 두붓집 주인이 커다란 손으로 찬물에 담가둔 두부 한모를 건져 검은 봉지에 담아주면 저녁이 오는 것 두부가 오는 것 * tirol's thought 갓 만든 두부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시다. '저녁, 소년, 두부장수...', 이런 말들 때문인지 김종삼 시인이 생각나기도 한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나는, '저녁'이라는 이미지에 무의식적으로 .. 2019. 8.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