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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4

TV 없는 주말 지난 금요일에 TV가 고장이 났다. TV 없는 세상은 황무지와 다를 것이 없다고 여기는 '시각문화 종사자'임를 자임하는 아내가 득달같이 A/S 센터에 전화를 했지만 수리 기사는 토요일 점심 때나 되어서 왔다. TV를 뜯어본 수리 기사 얘기로는 전압 공급 장치 쪽에 이상이 생겼는데 부품을 교체해야 한다, 수리비는 6-7만원 내외, 그것도 지금 당장은 안되고 화요일 저녁 때쯤이나 가능하다고 한다. 어쨌든 덕분에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밤까지 TV없는 주말을 보내게 되었는데 TV가 없다고 계속 투덜대는 아내와 달리 나는 아주 좋았다. 너무 허전하다 싶으면 간간히 음악을 들으며 아주 호젓한 주말을 보냈다. 평소에도 TV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주말엔 아무 생각없이 TV 앞에 습관적으로 앉아있는 시간이.. 2006. 1. 23.
금강경 읽는 밤 - 전윤호 금강경 읽는 밤 전윤호 내가 잠든 밤 골방에서 아내는 금강경을 쓴다 하루에 한 시간씩 말 안하고 생각 안하고 한 권을 온전히 다 베끼면 가족이 하는 일이 다 잘될 거라고 언제나 이유없이 쫓기는 꿈을 꾸다가 놀라 깨면 머리맡 저쪽이 훤하다 컴퓨터를 켜놓고 잠든 아이와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속에서 경을 쓰는 손길에 눈발이 날리는 소리가 난다 잡념처럼 머나먼 자동차소리 책장을 넘길 때마다 풍경소리 나는 두렵다 아내는 나를 두고 세속을 벗어나려는가 아직 죄없는 두 아이만 안고 범종에 새겨진 천녀처럼 비천한 나를 버리려는가 나는 기울어진 탑처럼 금이 가다가 걱정마저 놓치고 까무륵 잠든다 /현대시, 2005년 4월호/ * tirol's thought 내가 잠든 밤 나의 아내도 뭔가를 쓴다. 하루에 한 시간도 넘게 .. 2005. 12. 14.
울음의 힘 - 김충규 울음의 힘 김충규 새는 뼈가 순하여 날개만 펼쳐도 쏜살같이 날아가지만 때로는 세찬 바람 앞에 저항하기도 한다 날개 관절이 뜨겁게 달구어져 더 날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새는 꺽꺽 울음을 쏟아낸다 혀를 입천장에 바짝 올려붙여 울음의 울림을 제 몸에 심으며 그 울음의 힘으로 십 리를 날아간다 /김충규 시집,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 문학동네/ * tirol's thouht 요 며칠 아내가 많이 힘들어한다. 몇주전 걸린 감기 몸살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데다가 학교에, 직장에, 이런 저런 집안 일에 몸도 마음도 쉴 틈이 없는 것이 그 이유다. 최근에는 특별히 마음이 많이 쓰이는 걱정거리가 생긴 것도 알고 있다. 저녁을 먹으며 그런 자신의 상태에 대해 하소연을 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퉁박을 놓.. 2005. 10. 26.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을 뜯어주게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거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닥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2001. 9.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