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5 나는 내가 좋다 - 문태준 나는 내가 좋다 문태준 나의 안구에는 볍씨 자국이 여럿 있다 예닐곱살 때에 상처가 생겼다 어머니는 중년이 된 나를 아직도 딱하게 건너다보지만 나는 내가 좋다 볍씨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나의 눈이 좋다 물을 실어 만든 촉촉한 못자리처럼 눈물이 괼 줄을 아는 나의 눈이 좋다 슬픔을 싹 틔울 줄 아는 내가 좋다 tirol's thouht 어떻게 살아야 언제쯤 '나는 내가 좋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을까 시인의 안구에 있는 볍씨 자국 같은 내 안의 상처들 하나 둘 셋 헤아리다가 그만 두었다 아직 멀구나 '나는 내가 좋다' 2019. 11. 16. 處暑 - 문태준 처서 문태준 얻어온 개가 울타리 아래 땅 그늘을 파댔다 짐승이 집에 맞지 않는다 싶어 낮에 다른 집에 주었다 볕에 널어두었던 고추를 걷고 양철로 덮었는데 밤이 되니 이슬이 졌다 방충망으로는 여치와 풀벌레가 딱 붙어서 문설주처럼 꿈적대지 않는다 가을이 오는가, 삽짝까지 심어둔 옥수숫대엔 그림자가 깊다 갈색으로 말라가는 옥수수 수염을 타고 들어간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나온다 가을이 오는가, 감나무는 감을 달고 이파리 까칠하다 나무에게도 제 몸 빚어 자식을 낳는 일 그런 성싶다 지게가 집 쪽으로 받쳐 있으면 집을 더메고 간다기에 달 점점 차가워지는 밤 지게를 산쪽으로 받친다 이름은 모르나 귀익은 산새소리 알은체 별처럼 시끄럽다 * tirol's thought 어제가 처서. "24절기의 14번째로 태양 .. 2019. 8. 24. 바닥 - 문태준 바닥 문태준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 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 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 tirol's thought 가을이 되면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시는 "이 저녁 누가 죽어가나 보다'로 시작하는 김춘수의 '가을 저녁의 시'.. 2010. 10. 18. 시월에 - 문태준 시월에 문태준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시인세계 (2004년 겨울호) 2008. 10. 24. 엽서 - 문태준 엽서 문태준 바람이 먼저 몰아칠 것인데, 천둥소리가 능선 너머 소스라친다 이리저리 발 동동 구르는 마른 장마 무렵 내 마음 끌어다 앉힐 곳 파꽃 하얀 자리뿐 땅이 석 자가 마른 곳에 목젖이 쉬어 핀 꽃 창비시선 196, 문태준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 tirol's thought 문태준. 대학시절 안암문예창작강좌에서 만났던 친구. 그 시절 읽었던 그 친구의 시에 대한 내 느낌은 '단단하다'는 것이었다. 허튼 수작 안부리고, 엄살 떨지 않는 시. 아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서로 모른척 하기엔 어색할만큼의 안면. 꼭 한번 술 한잔 하고 싶었는데 그게 또 어디 그리 쉬운가, 하긴 또 어려울 것은 무엇이었던가. 2002. 1. 15.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