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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13

사랑과 평화 - 이문재 사랑과 평화 이문재 사람이 만든 책보다 책이 만든 사람이 더 많다* 사람이 만든 노래보다 노래가 만든 사람이 더 많다 사람이 만든 길보다 길이 만든 사람이 더 많다 사랑으로 가는 길은 오직 사랑뿐 사랑만이 사랑으로 갈 수 있다 그래야 사람이 만든 사랑보다 사랑이 만든 사람이 더 많아진다 평화로 가는 길 또한 오직 평화뿐 평화만이 평화로 갈 수 있다 평화만이 평화를 만들 수 있다 그래야 사람이 만든 평화보다 평화가 만든 사람이 더 많아진다 이 또한 오래된 일이다 * '사람이 만든 책보다 책이 만든 사람이 더 많다’라는 문장은 출처가 밝혀지지 않은 채 널리 알려져 있다. * tirol's thought 사람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책과 노래와 길과 사랑과 평화 그리고... 사람이 만들어져 가는 존재라는 것을.. 2024. 2. 29.
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줄 때 - 이문재 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줄 때 이문재 그는 두꺼운 그늘로 옷을 짓는다 아침에 내가 입고 햇빛의 문 안으로 들어설 때 해가 바라보는 나의 초록빛 옷은 그가 만들어준 것이다 나의 커다란 옷은 주머니가 작다 그는 나보다 옷부터 미리 만들어놓았다 그러므로 내가 아닌 그 누가 생겨났다 하더라도 그는 서슴지 않고 이 초록빛 옷을 입히며 말 한마디 없이 아침에는 햇빛의 문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저녁에 나의 초록빛 옷은 바래진다 그러면 나는 초록빛 옷을 저무는 해에게 보여주는데 그는 소리없이 햇빛의 문을 잠가버린다 어두운 곳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것들은 나를 좋아하는 경우가 드물고 설령 있다고 해도 나의 초록빛 옷에서 이상한 빛이 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나의 초록빛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두꺼운 그늘의 섬유로 .. 2011. 4. 28.
소금창고 - 이문재 소금창고 이문재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 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떼를 세어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 tirol's thought 내가 벌써 가을을 타는 건가. 우연히 이 시를 읽다가 가슴이 괜히 먹먹해졌다. 지하 1층에 있는 선큰 가든에 앉아 가르릉거리듯 비스듬이 비치는 저녁 햇살을 맞으며 담배를 피우는데도 자꾸 생각이 났다. 요즘들어 캘린더의 날짜와.. 2009. 9. 22.
시월 - 이문재 시월 이문재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은행잎을 떨어뜨린다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 노오랗게 물든 채 멈춘 바람이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 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버린다 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 2008. 10. 24.
기러기 가족 - 이상국 기러기 가족 이상국 아버지 송지호에 좀 쉬었다 가요 시베리아는 멀다 아버지 우리는 왜 이렇게 날아야 해요 그런 소리 말아라 저 밑에는 날개도 없는 것들이 많단다 * tirol's thought 중앙일보에서 연재되는 '시가 있는 아침'의 필자가 4월부터 이문재 시인으로 바뀌었다. 1월부터 3월까지 진행했던 문태준 시인이 고른 시들도 좋았지만 이문재 시인이 고르는 시들도 꽤 괜찮다. 쉽고 재미있다. 2006. 5. 8.
기념식수 - 이문재 기념식수 이문재 형수가 죽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감자를 구워 소풍을 간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개구리들은 땅의 얇은 천장을 열고 작년의 땅 위를 지나고 있다 아이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 교외선 유리창에 좋아라고 매달려 있다 나무들이 가지마다 가장 넓은 나뭇잎을 준비하려 분주하게 오르내린다 영혼은 온몸을 떠나 모래내 하늘을 출렁이고 출렁거리고 그 맑은 영혼의 갈피 갈피에서 삼월의 햇빛은 굴러떨어진다 아이들과 감자를 구워 먹으며 나는 일부러 어린왕자의 이야기며 안데르센의 추운 바다며 모래사막에 사는 들개의 한살이를 말해주었지만 너희들이 이 산자락 그 뿌리까지 뒤져본다 하여도 이 오후의 보물찾기는 또한 저문 강물을 건너야 하는 귀갓길은 무슨 음악으로 어루만져주어야 하는가 형수가 죽었다 아이.. 2006. 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