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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6

개 같은 가을이 -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최승자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매독 같은 가을.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한 쪽 다리에 찾아온다.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가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어디 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tirol's thought ‘개 같은 가을‘, ‘매독 같은 가을‘은 어떤 가을일까일단 분위기 있고, 여유있는 가을은 아닌게 분명하다.게다가 그냥 오는 것도 아니고 ’쳐들어‘ 온다.싸움을 걸듯, .. 2024. 10. 17.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겨울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 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오래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 source:http://goo.gl/DUy9H * tiro.. 2012. 2. 22.
가을 - 최승자 가을 최승자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그런데 세월이 내게로 왔습디다. 내 문간에 낙엽 한 잎 떨어뜨립디다. 가을입디다. 그리고 일진광풍처럼 몰아칩디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 오늘 내 문간에 기어이 휘몰아칩디다. / 최승자, '내 무덤, 푸르고', 문학과 지성사,2001/ * tirol's thought 8월의 마지막 날이다. 올 여름은 유난히도 길었던 것 같다. 8월이 가고 9월이 온다고 갑자기 가을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마음의 문간엔 벌써 낙옆 한 잎 떨어져 있다. 2006. 8. 31.
근황 - 최승자 근황 최승자 못 살겠습니다 (실은 이만하면 잘 살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원한다면, 죽여주십시오. 생각해보면,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내 죄이며 내 업입니다. 그 죄와 그 업 때문에 지금 살아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잘 살아 있습니다. /최승자 시집, 내 무덤 푸르고, 문학과 지성사/ * tirol's thought 누군가를 죽을만큼, 죽고 싶을만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오히려 내가 이 시에 끌리는 이유는 그 절박한 '사랑'보다는 '잘 살아 있습니다'라는 근황과 '못 살겠습니다'라는 근황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시인의 마음 때문이다. '잘 사는 것'과 '못 살겠는 것' 사이의 거리, 멀고도 가까운. 2005. 5. 26.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 최승자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최승자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2004. 7. 14.
이제 가야만 한다 - 최승자 이제 가야만 한다 최승자 때로 낭만주의적 지진아의 고백은 눈물겹기도 하지만, 이제 가야만 한다 몹쓸 고통은 버려야만 한다. 한때 한없는 고통의 가속도, 가속도의 취기에 실려 나 폭풍처럼 세상 끝을 헤매었지만 그러나 고통이라는 말을 이제 결코 발음하고 싶지 않다.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 위에서 나는 너무 오래 뒤뚱거리고만 있었다. 목구멍과 숨을 위해서는 동사만으로 충분하고, 내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허덕일지라도 오냐 온몸 온정신으로 이 세상을 관통해보자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을 수 없을 때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문학과 지성사 시인선 78, 최승자 시집 '기억의 집'/ * tirol's thought 그래 모두 맞다. "몹쓸 고통은 버려야 하고" 나역시 "고통이라는.. 2001. 9.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