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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6

나리 나리 개나리 - 기형도 나리 나리 개나리 기형도 누이여 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 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 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 한 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 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 맨발로 산보할 때 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 이슬 턴 풀잎새로 엉겅퀴 바늘을 살라주었다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나리 나리 개나리 네가 두들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2008. 3. 21.
10월 - 기형도 10월 기형도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2006. 10. 10.
백창우가 부르는 기형도의 '빈집' 어제 EBS의 '스페이스 공감'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백창우씨가 기형도의 '빈 집'에 곡을 붙여 노래하는 걸 보았다.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 오래도록 남아서 잊혀지지 않는다. 인터넷을 뒤져 곡을 찾았다. 백창우씨의 웹페이지(http://www.100dog.co.kr)에 있는 '노래편지' 중 하나에 배경음악으로 깔려 있어서 링크를 걸어본다. 2006. 6. 12.
티롤의 다섯번째 포임레러 [2002.12.2. MON. 티롤의 다섯번째 포임 레러~] ◈ tirol's greeting 12월이 되었습니다. 감기는 지나갔고요. 눈, 캐롤, 크리스마스, 송년회... 해마다 오는 년말이건만 어김없이 사람들은 이런 단어들을 떠올리며 가슴 설레합니다. 저요? 저야, 우울하죠. 서른셋과 서른넷이란 숫자가 주는 느낌의 차이를 가늠해보며 속수무책으로 한 해를 보내고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해야하는 심정이 유쾌발랄할리 있겠습니까. 하지만 제 특기가 '정리정돈'이고 취미가 '계획세우기'인지라 아프고 바쁘단 핑계로 정신없이 지낸 11월과는 달리 12월엔 새 마음으로 정리정돈 잘 하고 새해 계획을 세워보려고 합니다. =-=-=-=-=-=-=-=-=-=-=-=-=-=-=-=-=-=-=-=-=-=-=-=-=-=-=-.. 2002. 12. 2.
엄마 걱정 - 기형도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tirol's thought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가셨던 건 아니지만, 나도 '찬밥처럼 방에 담겨' 천천히 숙제를 하며 엄마를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그 '서늘한 유년의 윗목' 요며칠 눈밑이 뻑뻑하다. 누가 옆에서 쿡 찌르면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가득찬 물잔을 들고 다니듯이 조심조심 지내고 있다. 엄마 때문이냐고? 글쎄... 2002. 11. 7.
빈집 - 기형도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문학과 지성'시인선80. 기형도 시집 '입속의 검은 잎' 77p. * tirol's thought 94.05.20. 13:25 청주행 승차권(승객용). 좌석번호 1. /1990.5,21.奎/015-241-0797.박상준/특별써비스권, 하트프라자 노래방/42p. '물 속의 사막'이란 시 제목에 동그라미/17p. '조치원'이라는 시 다섯번째 줄 '젖은 담배 필터 같은 기침 몇 개를'이란 부분에 밑줄./빈 집에.. 2001. 9.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