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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 고형렬 북천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고형렬 고성 북천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 북천에게 편지 쓰지 않는다 눈이 내려도 찾아가지 않고 멀리서 살아간다 아무리 비가 내려도 바다가 넘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 바다에게 편지 쓰지 않는다 나는 그 북천과 바다로부터 멀어질 뿐이다 더는 멀어질 수 없을 때까지 나와 북천과 바다는 만날 수 없다 오늘도 그 만날 수 없음에 대해 한없이 생각하며 길을 간다 너무 오래된 것들은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래도 너무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나의 영혼 속에 깊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고성 북천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길을 가다가도 나는 몇날 며칠 그 북천의 가을물이 되어 흘러간다 다섯살 때의 바다로 기억도 나지 않는 서른다섯 때의 아침 바.. 2020. 9. 12.
빗방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 이현승 빗방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이현승 밤의 도시를 바라볼 때처럼 명확해질 때는 없다. 어두운 천지에 저마다 연등을 달아놓듯 빛나는 자리마다 욕정이, 질투가, 허기가 있다. 이것보다 명확한 것이 있는가. 십자가가 저렇게 많은데, 우리에게 없는 것은 기도가 아닌가. 입술을 적시는 메마름과 통점에서 아프게 피어나는 탄식들. 일테면 심연에 가라앉아 느끼는 목마름. 구할 수 없는 것만을 기도하듯 간절함의 세목 또한 매번 불가능의 물목이다. 오늘은 내가 울고 내일은 네가 웃을 테지만 내일은 내가 웃고 네가 기도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울다 잠든 아이가 웃으며 잠꼬대를 할 때, 배 속은 텅 빈 냉장고 불빛처럼 허기지고 우리는 아플 때 더 분명하게 존재하는 경향이 있다. 아프게 구부러지는 기도처럼, 빛이 휜다. *.. 2020. 7. 25.
여름 - 권오삼 여름 권오삼 해는 활활 매미는 맴맴 참새는 짹짹 까치는 깍깍 나뭇잎은 팔랑팔랑 개미는 뻘뻘 모두모두 바쁜데 구름만 느릿느릿 * tirol's thought 주택에 살던 때가 있었다 짱짱하게 더운 여름날 오후 미숫가루 한 사발 타 마시고 마루에 누워 하릴 없이 뒹굴거리다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던 때가 생각난다 느릿느릿 가는 것 같지만 또 어느새 이쪽에서 저쪽으로 스으윽 미끄러져 가는 구름 눈 돌려 마루 천장 무늬를 하나둘 헤아리다가 스르르 한참 지나 잠 깨어 멍하니 앉았있던 느릿느릿 시간이 흐르던 기다려도 안 오시던 엄마를 기다리던 그 때가 생각난다 2020. 7. 5.
메밀국수 - 박준 메밀국수 - 철원에서 보내는 편지 박준 분지의 여름밤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밤이 되어도 화기火氣가 가시지 않을 것 같아 저녁밥을 안치는 대신 메밀국수를 사 먹고 돌아왔습니다 동송으로 가면 삼십년 된 막국수집이 있고 갈말로 가면 육십 년 된 막국수집이 있는데 저는 이 시차를 생각하며 혼자 즐거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말한 제 아버지는 사십 년 동안 술을 드셨고 저는 이십 년 동안 마셨습니다 돌아오는 길, 문밖으로 나와 연신 부채질을 하던 이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에게 저녁을 먹었는지 물었습니다 국수를 먹었다고 대답하기도 했고 몇 분에게는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주인집 어른께는 입맛이 없어 걸렀다고 답했다가 "저녁은 저녁밥 먹으라고 있는 거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주말에 큰비가 온다고 하니 이곳 사람들.. 2020. 6. 27.
연애에 대하여 - 이성복 연애에 대하여 이성복 1 여자들이 내 집에 들어와 지붕을 뚫고 담 넘어간다 손이 없어 나는 붙잡지 못한다 벽마다 여자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 여자들이 내 방에 들어와 이불로 나를 덮어 싼다 숨 막혀 죽겠어 ! 이불 위에 올라가 여자들이 화투를 친다 숨 막힌 채로 길 떠난다 길 가다 외로우면 딴 생각하는 길을 껴안는다 2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만났다 버리고 버림받았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손 잡고 입맞추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났다 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 헌 옷을 좀먹게 하는 기도,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숨쉬고 숨졌다 지금 내 숨가쁜 屍身을 밝히는 촛불들 愛人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술집 3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 2020. 6. 21.
우산을 쓰다 - 심재휘 우산을 쓰다 심재휘 어제는 꽃잎이 지고 오늘은 비가 온다고 쓴다 현관에 쌓인 꽃잎들의 오랜 가뭄처럼 바싹 마른 나의 안부에서도 이제는 빗방울 냄새가 나느냐고 추신한다 좁고 긴 대롱을 따라 서둘러 우산을 펴는 일이 우체국 찾아가는 길만큼 낯설 것인데 오래 구겨진 우산은 쉽게 젖지 못하고 마른 날들은 쉽게 접히지 않을 터인데 빗소리처럼 오랜만에 네 생각이 났다고 쓴다 여러 날들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많은 것들이 말라 버렸다고 비 맞는 마음에는 아직 가뭄에서 환도하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 너무 미안하다고 쓴다 우습게도 이미 마음은 오래전부터 진창이었다고 쓰지 않는다 우산을 쓴다 tirol's thought 비는 언젠가는 올 것인데 비가 오지 않는 동안은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비가 오지 않은 여러 날.. 2020.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