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쉰이 되었다
이면우
서른 전, 꼭 되짚어보겠다고 붉은 줄만 긋고 영영 덮어버린 책들에게 사죄한다 겉 핥고 아는 체했던 모든 책의 저자에게 사죄한다
마흔 전, 무슨 일로 다투다 속맘으론 낼, 모레쯤 화해해야지 작정하고 부러 큰 소리로 옳다고 우기던 일 아프다 세상에 풀지 못한 응어리가 아프다
쉰 전, 늦게 둔 아이를 내가 키운다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그 어린 게 날 부축하며 온 길이다 아이가 이 구절을 마음으로 읽을 때쯤이면 난 눈썹 끝 물방울 같은 게 되어 있을 게다
오늘 아침, 쉰이 되었다, 라고 두 번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서늘한 방에 앉았다가 무릎 한번 탁 치고 빙긋이 혼자 웃었다
이제부턴 사람을 만나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따끈한 국밥 한그릇씩 꼭 대접해야겠다고, 그리고
쓸쓸한 가운데 즐거움이 가느다란 연기처럼 솟아났다
<이면우,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창비, 2001>
* tirol's thought
술을 어정쩡하게 먹어서 그런가
새벽에 잠이 깨서 거실을 어슬렁거리다
우연히 이면우 시인의 시집을 꺼내 읽었다.
시집 중간 중간 한 쪽 귀퉁이를 접어둔 곳도 있고
밑줄을 치거나 메모를 해둔 페이지도 있다.
그런데 이 시가 있는 페이지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다.
시집 앞에 적어둔 날짜를 보니 2010.1.6.
그때는 이 시가 실감이 안났을 수도 있겠다.
이 시를 읽는 오늘의 내 모습을 상상해 보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이른 새벽 십년 만에 다시 휘리릭 읽어보는 시집에서
제일 마음에 걸리는 시는 바로 이 시다.
'쓸쓸한 가운데 즐거움이 가느다란 연기처럼 솟아'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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