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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5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 안도현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안도현 뛰어내렸어요, 당신은 무거운 권위주의 의자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뛰어내렸어요, 당신은 끝도 없는 지역주의 고압선 철탑에서 버티다가 눈물이 되어 버티다가 뛰어내렸어요, 당신은 편 가르고 삿대질하는 냉전주의 창끝에서 깃발로 펄럭이다 찢겨진, 그리하여 끝내 허공으로 남은 사람 고마워요, 노무현 아무런 호칭 없이 노무현이라고 불러도 우리가 바보라고 불러도 기꺼이 바보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아, 그러다가 거꾸로 달리는 미친 민주주의 기관차에서 당신은 뛰어내렸어요, 뛰어내려 으깨진 붉은 꽃잎이 되었어요 꽃잎을 두 손으로 받아주지 못해 미안해요 꽃잎을 두 팔뚝으로 받쳐주지 못해 미안해요 꽃잎을 두 가슴으로 안아주지 못해 미안해요 저 하이에나들이 밤낮으로 물어뜯은 게 한 장.. 2009. 5. 29.
겨울 강가에서 - 안도현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 tirol's thought 어떤 시선을 갖느냐는 정말 중요하다. 동일하게 벌어진 사건이 여러 시선을 통해 해석될 때 그 해석의 격차는 생각보다 크다. 시선에 따른 해석의 격차가 존재하리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자신의 시선만을 진리라고 믿는,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을 강요하려고 드는 사람들이.. 2008. 12. 5.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 안도현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안도현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올 때가 있네 도꼬마리의 까실까실한 씨앗이라든가 내 겨드랑이에 슬쩍 닿는 민석이의 손가락이라든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와서 나를 갈아엎는 치통이라든가 귀틀집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라든가 수업 끝난 오후의 자장면 냄새 같은 거 내 몸에 들어와서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마구 양푼 같은 내 가슴을 긁어댈 때가 있네 사내도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네 고대광실 구름 같은 집이 아니라 구름 위에 실컷 웅크리고 있다가 때가 오면 천하를 때릴 천둥 번개 소리가 아니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오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서러워져 소주 한잔 마시러 가네 소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이 저의 감옥인 줄도 모르고 내 몸에 들어와서.. 2006. 9. 10.
꽃 - 안도현 꽃 안도현 바깥으로 뱉어내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것이 몸 속에 있기 때문에 꽃은, 핀다 솔직히 꽃나무는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게 괴로운 것이다 내가 너를 그리워하는 것, 이것은 터뜨리지 않으면 곪아 썩는 못난 상처를 바로 너에게 보내는 일이다 꽃이 허공으로 꽃대를 밀어올리듯이 그렇다 꽃대는 꽃을 피우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자기 몸을 세차게 흔든다 사랑이여, 나는 왜 이렇게 아프지도 않는 것이냐 몸 속의 아픔이 다 말라버리고 나면 내 그리움도 향기나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살아남으려고 밤새 발버둥을 치다가 입 안에 가득 고인 피, 뱉을 수도 없고 뱉지 않을 수도 없을 때 꽃은, 핀다 /안도현, 바닷가 우체국, 문학동네, 1999/ * tirol's thought 안도현의 시는 너무 잘 읽혀서 수상쩍다. 2003. 2. 20.
작은 짐승 - 신석정 작은 짐승 신석정 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蘭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蘭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蘭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蘭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이름이 란(蘭)이라는 여자애가 있었다. 안도현 이름의 끝 글자가 '蘭'인 여자애가 있었다.. 2001. 9.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