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글판12 얼음새꽃 - 곽효환 얼음새꽃 곽효환 아직 잔설 그득한 겨울 골짜기 다시금 삭풍 불고 나무들 울다 꽁꽁 얼었던 샛강도 누군가 그리워 바닥부터 조금씩 물길을 열어 흐르고 눈과 얼음의 틈새를 뚫고 가장 먼저 밀어 올리는 생명의 경이 차디찬 계절의 끝을 온몸으로 지탱하는 가녀린 새순 마침내 노오란 꽃망울 머금어 터뜨리는 겨울 샛강, 절벽, 골짜기 바위틈의 들꽃, 들꽃들 저만치서 홀로 환하게 빛나는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 아니 너다 * 곽효환 시집, 지도에 없는 집, 2010, 문학과지성사. * tirol's thought 교보 광화문 글판 겨울편으로 올라 온 시. 내 생각에 사실 이 시의 키는, 둘째연이다. '너였으면 좋겠다/ 아니 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춥고, 외롭고, 힘들어도 믿음을.. 2010. 12. 30. 약리도 - 조정권 약리도(躍鯉圖) 조정권 물고기야 뛰어 올라라 최초의 감동을 나는 붙잡겠다 물고기야 힘껏 뛰어 올라라 풀바닥 위에다가 나는 너를 메다치겠다 폭포 줄기 끌어내려 네 눈알을 매우 치겠다 매우 치겠다 * source: http://blog.naver.com/kyobogulpan/140069446750 * tirol's thought 2009년도 여름 교보글판에 올라온 시다. 뭔가 하나를 끈질기게 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러나 한편 끈질기게 뭔가를 하다보면 낱낱의 것들이 가질 수 없는 어떤 의미가 생겨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매년 생일에 사진을 한 장씩 찍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하지만 매년 빼놓지 않고 생일에 사진 찍는 일을 50년쯤 한다고 하면 그 50장의 사진은 한 사람의 삶의 기록을 넘어서는.. 2009. 6. 26.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가 - 파블로 네루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가 파블로 네루다 하루가 지나면 우린 만날 것이다. 그러나 하루 동안 사물들은 자라고, 거리에선 포도가 팔리며, 토마토 껍질이 변한다. 또 네가 좋아하던 소녀는 다시는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갑자기 우체부를 바꿔버렸다. 이제 편지는 예전의 그 편지가 아니다. 몇 개의 황금빛 잎사귀, 다른 나무다. 이 나무는 이제 넉넉한 나무다. 옛 껍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대지가 그토록 변한다고 누가 우리에게 말해주랴? 대지는 어제보다 더 많은 화산을 가졌고, 하늘은 새로운 구름들을 가지고 있다. 또 강물은 어제와 다르게 흐른다.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이 건설되는가! 나는 도로와 건물들, 배나 바이올린처럼 맑고 긴 교량의 낙성식에 수없이 참석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인.. 2008. 3. 11. 단풍 드는 날 - 도종환 단풍 드는 날 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着)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 도종환 시집,슬픔의 뿌리, 실천문학사, 2005년 10월/ * tirol's thought 내 친구 종인이가 이번 가을 교보글판의 글로 올라왔다고 알려준 시다. 나는 아직 '아름답게 불탈' 때가 안되었는지 뭘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내 삶의 이유에 대해서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동물원의 노래 가사처럼 여전히 '어딘가 있을 무언가를 아직 찾고' 있는 중. 그래도, 뭐, 가을에 읽기에는 나쁘지 않은 시.. 2007. 9. 17. 강설 - 고은 강설 고은 폐허(廢墟)에 눈 내린다. 적(敵)도 동지(同志)도 함께 모이자. 함께 눈을 맞자. 눈 맞으며 껴안고 울자. 폐허(廢墟)에 눈 내린다. 우리가 1950년대(年代)에 깨달은 것은 인산인해(人山人海)의 죽음이 아니라 사랑이다.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모든 죽은 사람들까지도 살아나서 함께 눈을 맞자. 눈 맞으며 울자. 우리는 분명 죄(罪)의 족속(族屬)이다. 눈을 맞자. 눈 맞으며 사랑하자. * tirol's thought 언젠가 비보다 눈이 좋은 이유가 눈은 비보다 천천히 내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 시를 읽다보니 눈이 흰 색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눈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모르는 척 아닌 척 해도 사람은 분명 '죄의 족속'이라는 것을 깨닫는 무의식이 순.. 2006. 12. 19. 해마다 봄이 되면 - 조병화 해마다 봄이 되면 조병화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쉼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둑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 tirol's thought 요 며칠 세차게 바람이 불었다. 제 아무리 거세도 봄바람은 봄바람인지라 바람.. 2006. 3. 14.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