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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9

목도장 - 장석남 목도장 장석남 서랍의 거미줄 아래 아버지의 목도장 이름 세 글자 인주를 찾아서 한번 종이에 찍어보니 문턱처럼 닳아진 성과 이름 이 도장으로 무엇을 하셨나 눈앞으로 뜨거운 것이 지나간다 이 흐린 나라를 하나 물려주는 일에 이름이 다 닳았으니 국경이 헐거워 자꾸만 넓어지는 이 나라를 나는 저녁 어스름이라고나 불러야 할까보다 어스름 귀퉁이에 아버지 흐린 이름을 붉게 찍어놓으니 제법 그럴싸한 표구가 되었으나 그림은 비어있네 * tirol's thought 아버지는 무슨 서류에 그렇게 도장을 찍고 다니셨기에 도장이 문턱처럼 닳았을까 헐거워지는 국경처럼 빛과 어둠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저녁 어스름이면 생각나는 것들 낙관도 찍고 표구도 되었는데 그림은 비어있다네. 아버지가 물려주신 흐린 나라는 빈 그림으로 내 앞에 있네. 2022. 1. 11.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장석남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 다시 그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 인젠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잔상들 지나가는 바람이 잠시 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 tirol's thought 나이가 들며 새로 생긴 불편한 것 중 하나는 발 뒤꿈치의 각질. 양말을 신을 때나 이불을 덮을 때 직물에 각질이 긁히는 느낌이 너무 안좋다.얼마 전에는 인터넷으로 발각질 제거제도 샀는데 생각보다 효과는 그다지...그런 각질로 고민하다가 이 시를 읽으니 마치 무슨 애기 뒤꿈치를 보는 느낌이랄.. 2019. 1. 3.
봉숭아를 심고 - 장석남 봉숭아를 심고 장석남 조그만 샛강이 하나 흘러왔다고 하면 될까 바람들이 슬하의 식구들을 데리고 내 속눈썹을 스친다고 하면 될까 봉숭아 씨를 얻어다 화분에 묻고 싹이 돋아 문득 그 앞에 쪼그리고 앉는 일이여 돋은 떡잎 위에 어른대는 해와 달에도 겸하여 조심히 물을 뿌리는 일이여 후일 꽃이 피고 씨를 터뜨릴 때 무릎 펴고 일어나며 一生을 잘 살았다고 하면 되겠나 그 중 몇은 물빛 손톱에게도 건너간 그러한 작고 간절한 一生이 여기 있었다고 있었다고 하면 되겠나 이 애기들 앞에서 * tirol's thought 어제는 종일 현우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아이를 돌보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래도 이런 시를 보면, 내년 봄에는 현우와 함께 봉숭아를 화분에 심어봐야지, 하는 생.. 2009. 3. 2.
꽃 본 지 오래인 듯 - 장석남 꽃 본 지 오래인 듯 장석남 가을 꽃을 봅니다 몇 포기 바람과 함께 하는 살림 바람과 나누는 말들에 귀 기울여 굳은 혀를 풀고요 그 철늦은 흔들림에 소리나는 아이 울음 듣고요 우리가 스무 살이 넘도록 배우지 못한 우리를 맞는 갖은 설움 그런 것들에 손바닥 부비다보면요 얘야 가자 길이 멀다 西山이 내려와 어깨를 밉니다 그때 우리는 당나귀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타박타박 길도 없이 가는 곳이 길이거니 꽃 본 지 오래인 듯 떠납니다 가을은 가구요 /장석남,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문학과지성사, 1993/ * tirol's thought 가을이 갑니다. 가을 꽃을 볼 새도 없이 머리깍고 낮잠 한숨 자고 나면 훌쩍 지나버리고 마는 일요일 오후처럼 가을이 갑니다. 2006. 11. 13.
저녁의 우울 - 장석남 저녁의 우울 장석남 여의도 분식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강변을 걸었다 강은 내게 오래된 저녁과 속이 터진 어둠을 보여주며 세상을 내려갔다 청둥오리도 몇 마리 산문처럼 물 위에 떴다 날곤 날곤 했다 그러면 강은 끼루루룩 울었다 내가 너댓 개의 발걸음으로 강을 걷는 것은 보고 싶은 자가 내가 닿을 수 없는 멀리에 있는 사사로운 까닭이지만, 새가 나는데 강이 우는 것은 울며 갑작스레 내 발치에서 철썩이는 것은 이 저녁을 어찌 하겠다는 뜻일까 /장석남,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문학과지성 시인선 112), 문학과지성사, 1999년 09월/ * tirol's thought 강남의 한 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매연과 소음으로 가득찬 보도를 걷는다. 이 아득하고 어지럽고 심란한 점심의 우울에 비하면 저녁 강변의 우울은 따뜻해 .. 2006. 9. 7.
불 꺼진 하얀 네 손바닥 - 장석남 불 꺼진 하얀 네 손바닥 장석남 내가 온통 흐느끼는 나뭇가지 끝에서 다가갈 곳 다한 바람처럼 정처 없어할 때 너는 내게 몇 구절의 햇빛으로 읽혀진다 가슴 두드리는 그리움들도 묵은 기억들이 살아와 울자고 청하는 눈물도 눈에 어려 몇 구절 햇빛으로 읽혀진다 불 꺼진 하얀 네 손바닥 햇빛 속에서 자꾸 나를 부르는 손짓 우리가 만나 햇빛 위를 떠오르는 어지러움이 된다면 우리가 서로 꼭 껴안고서 물방울이 된다면 정처 없는 발자국 위에도 꽃이 피어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리 * tirol's thought 연말에는 매섭게도 춥고 눈 내리더니 새해가 되니 창 밖 환하고 따뜻하다. 어제 저녁엔 오랫만에 조카 지은이와 통화를 했다. "지은이, 이제 몇살이야?" "일곱살" "삼촌은 이제 서른 일곱살 됐어" "그럼 삼촌은 작.. 2006. 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