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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저녁 스며드네 - 허수경

by tirol 2019. 7. 6.

저녁 스며드네

 

허수경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물방울은 동그르 꽃 밑에 꽃 연한 살 밑에 먼 곳에서 벗들은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고 저녁 스며드네,

  한때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의 모든 주막이 일제히 문을 열어 마치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저녁을 거두어들이는 듯했는데,

  지금 우리는 술자리에 앉아 고기를 굽네 양념장 밑에 잦아든 살은 순하고 씹히는 풋고추는 섬덕섬덕하고 저녁 스며드네,

   마음 어느 동그라미 하나가 아주 어진 안개처럼 슬근슬근 저를 풀어놓는 것처럼 이제 우리를 풀어 스며드는 저녁을 그렇게 동그랗게 안아주는데,

  어느 벗은 아들을 잃고 어느 벗은 집을 잃고 어느 벗은 다 잃고도 살아남아 고기를 굽네

 

  불 옆에 앉아 젓가락으로 살점을 집어 불 위로 땀을 흘리며 올리네, 

  잎들은 와르르 빛 아래 저녁 빛 아래 빛 아래 그렇게 그렇게 스며드는 저녁, 저녁 스며드네

 

 

 <허수경,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사, 2005>

 

 

*  tirol's thought

 

129페이지까지 있는 이 시집의 시 중에서 그나마 쉽게 읽히는 시

저녁 어스름에 모여 고기를 굽는 친구들 밥보다는 술이 어울리는 자리

아들을 잃고 집을 잃고 모든 것을 잃고도 살아남아 땀을 흘리며 고기를 굽는 저녁

우리가 저녁을 안아주는 것인지 저녁이 우리를 안아주는 것인지 동그랗게 동그랗게

전체 7연 중에, 왜 5연과 7연에는 다른 연에는 있는 쉼표가 없는걸까

아니 1, 2, 3, 4, 6연 마지막에는 쉼표가 있는걸까 일부러 혹은 실수

시인에게 물어보고 싶어도 이제 시인은 이 세상에 없다

저녁처럼 그렇게 그렇게 저편으로 스며들어 가 버리고 없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저녁이 오면 고기를 구워야지

불 옆에 앉아 땀을 흘리며 그렇게 그렇게

어느 연에 쉼표가 없는 이유와 쉼표가 있는 이유와

가버리고 없는 시인과 잘 해석되지 않는 시를 읊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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