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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의 힘 - 백무산 정지의 힘 백무산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2020. 6. 7.
밤길 - 최하림 밤길 최하림 한 날이 저무는 저녁답에 갈가마귀 울음소리 드높아가고 낮의 푸르름과 밤의 깊음이 가야 할 길을 마련하는데 바다의 폭풍으로도 오막살이 지청구로도 발길이 향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림자를 은신하며 술집으로 술집으로 돌면서 잔을 들고 있다 식은 가슴을 태우고 말을 태우는 잔 불길같은 사나이들이 마시는 잔 잔이여 우리들은 무엇으로 길잡이를 삼아야 하는가 온밤을 헤매 이른 우이동 골짝의 바람소리인가 산허리에 등을 붙이고 산 헐벗은 이웃들의 울음인가 연민으로 새끼들을 등을 업고 아내를 끌어안아도 한날의 푸르름과 깊음은 드러나지 않고 도봉산의 갈멧빛도 물들어지지 않는다 쓸쓸한 갈가마귀 울음소리 드높아갈 뿐이다 tirol’s thought ‘잔이여 우리들은 무엇으로 길잡이를 삼아야 하는가’라는 구절을 오래 .. 2020. 2. 23.
2019년에 내가 좋아한 책 2019년에는 76권의 책을 읽었다. 그 중 내 맘대로 1등부터 5등까지 뽑아 봤다. 올해는 어떤 책들을 만나게 될 지, 그 책들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지 기대가 된다. 1.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2018, 한겨레출판. 2.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2019, 김영사. 3. 최은영, 쇼코의 미소, 2016, 문학동네. 4. 김연수, 언젠가 아마도, 2018, 컬처그라퍼. 5. 김창준, 함께 자라기, 2018, 인사이트. 2020. 1. 23.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을 불러도 - 전동균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을 불러도 전동균 산밭에살얼음이 와 반짝입니다 첫눈이 내리지도 않았는데고욤나무의 고욤들은 떨어지고 일을 끝낸 뒤저마다의 겨울을 품고흩어졌다 모였다 다시 흩어지는 연기들 빈손이어서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군요 보이는 것은보이지 않는 것에서 왔고저희는저희 모습이 비치면 금이 가는 살얼음과도 같으니 이렇게 마른 입술로당신이 없는 곳에서당신과 함께당신을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 tirol's thouht 가을인가 싶더니 어느새 겨울. 첫눈은 내렸다고 해야할지 아니라고 해야할지 고민이 되지만'빈손이어서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는' 계절이라는 사실은 분명한 듯 합니다.한 계절이 가고 다른 계절이 오고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오고.중학교 생물 시간에 배웠던 것 같은데,'개체의 발생은 종의 발생을.. 2019. 12. 15.
선잠 - 박준 선잠 박준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 tirol's thouht 연말이 가까와 오니 옛친구들 만날 일이 는다. 어제도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서 배가 고프지 않아도 나도 모르게 집어먹는 안주처럼 오래되었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설렁설렁 나누며 술을 마셨다 한 친구가 당나라의 명필 '안진경' 얘기를 잠깐 꺼냈다가 집어 넣었다. '그해 우리는'으로 시작하는 이 시를 읽으면 떠오르는 희미한 '그해'는 언제 적 .. 2019. 11. 23.
나는 내가 좋다 - 문태준 나는 내가 좋다 문태준 나의 안구에는 볍씨 자국이 여럿 있다 예닐곱살 때에 상처가 생겼다 어머니는 중년이 된 나를 아직도 딱하게 건너다보지만 나는 내가 좋다 볍씨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는 나의 눈이 좋다 물을 실어 만든 촉촉한 못자리처럼 눈물이 괼 줄을 아는 나의 눈이 좋다 슬픔을 싹 틔울 줄 아는 내가 좋다 tirol's thouht 어떻게 살아야 언제쯤 '나는 내가 좋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을까 시인의 안구에 있는 볍씨 자국 같은 내 안의 상처들 하나 둘 셋 헤아리다가 그만 두었다 아직 멀구나 '나는 내가 좋다' 2019. 1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