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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호4

떠날 때 1 - 전윤호 떠날 때 1 전윤호 목초가 말라 죽은 저문 들판을 바라본다 이제 돌봐야 할 가축은 없다 말 한 필로 남은 내게 불지른 천막은 짐일 뿐이다 떠날 채비는 끝났다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 내게 찾아올 반가운 소식은 없다 나는 떠난다 초승달 아래로 새로운 소 떼를 찾아 하늘의 지붕을 넘고 빙하가 녹은 강을 건너면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말 등에 사는 족속에게 이별은 사소한 것 소중한 건 고삐를 잡는 힘이다 나는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다 * tirol's thought 내겐 '유목민적'인 속성보다는 '정착민적'인 속성이 많지만 가끔은 '내가 정말 제대로 살고 있는건가, 정말 이러고 살아야 하는건가,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맞는가'라는 생각들로 서성거리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금새 '이러고 안 살면 어떻.. 2006. 8. 23.
물귀신 - 전윤호 물귀신 전윤호 내가 먼저 빠졌다 만만하게 봤는데 목숨보다 깊었다 어차피 수영금지구역이었다 어설프게 손 내밀다 그도 빠진 건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서로 나가기 위해서 발목을 잡아당겼다 나는 안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부서지는 고통을 우리는 익사할 것이다 바닥에 즐비한 다른 연인들처럼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내가 먼저 빠졌다 /전윤호 시집, 연애소설, 다시, 2005/ * tirol's thought 인터넷에서 우연히 읽은 전윤호 시인의 시들이 재미있어서 최근에 나온 시집을 사서 읽었다. 아주 재미있고 잘 읽힌다. 시집 뒤에 붙은 해설에도 나오듯이 그의 시는 내가 좋아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인 김광규 시인의 시와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정직하지만 무겁지 않고, 무겁지 않지만 경박하지도 않다. 지루한 일상 속에서.. 2006. 1. 11.
사직서 쓰는 아침 - 전윤호 사직서 쓰는 아침 전윤호 상기 본인은 일신상의 사정으로 인하여 이처럼 화창한 아침 사직코자 하오니 그간 볶아댄 정을 생각하여 재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머슴도 감정이 있어 걸핏하면 자해를 하고 산 채 잡혀먹기 싫은 심정에 마지막엔 사직서를 쓰는 법 오늘 오후부터는 배가 고프더라도 내 맘대로 떠들고 가고픈 곳으로 가려 하오니 평소처럼 돌대가리 같은 놈이라 생각하시고 뒤통수를 치진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전윤호 시집, 연애소설, 다시, 2005/ * tirol's thought 며칠째 내년도 '목표'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다. 점심을 먹다가 회사 선배들에게 '형님들의 내년도 '목표'는 뭐냐'고 물어보니까 한 사람은 '돈을 많이 버는 것', 또 한 사람도 그 비슷한 것(솔직히 기억이 잘 안난다)이라고 답한.. 2005. 12. 15.
금강경 읽는 밤 - 전윤호 금강경 읽는 밤 전윤호 내가 잠든 밤 골방에서 아내는 금강경을 쓴다 하루에 한 시간씩 말 안하고 생각 안하고 한 권을 온전히 다 베끼면 가족이 하는 일이 다 잘될 거라고 언제나 이유없이 쫓기는 꿈을 꾸다가 놀라 깨면 머리맡 저쪽이 훤하다 컴퓨터를 켜놓고 잠든 아이와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속에서 경을 쓰는 손길에 눈발이 날리는 소리가 난다 잡념처럼 머나먼 자동차소리 책장을 넘길 때마다 풍경소리 나는 두렵다 아내는 나를 두고 세속을 벗어나려는가 아직 죄없는 두 아이만 안고 범종에 새겨진 천녀처럼 비천한 나를 버리려는가 나는 기울어진 탑처럼 금이 가다가 걱정마저 놓치고 까무륵 잠든다 /현대시, 2005년 4월호/ * tirol's thought 내가 잠든 밤 나의 아내도 뭔가를 쓴다. 하루에 한 시간도 넘게 .. 2005. 1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