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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횡단 - 김기택 무단횡단 김기택 갑자기 앞차가 급정거했다. 박을 뻔했다. 뒷좌석에서 자던 아이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습관화된 적개심이 욕이 되어 튀어나왔다. 앞차 바로 앞에서 한 할머니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횡단보도가 아닌 도로 복판이었다. 멈춰선 차도 행인도 놀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하고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걷다보니 갑자기 도로와 차들이 생긴 걸음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도저히 빨라지지 않는 걸음이었다. 죽음이 여러 번 과속으로 비껴간 걸음이었다. 그보다 더한 죽음도 숱하게 비껴간 걸음이었다. 속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본 걸음이었다. 이제는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느린 걸음이었다. 걸음이 미처 인도에 닿기도 전에 앞차가 튀어나갔다. 동시에 뒤에 늘어선 차들이 사납게 빵빵거렸다. *tirol'.. 2004. 9. 30.
폐(廢)타이어 - 김종현 폐(廢)타이어 김종현 아파트 공터 한 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 있다 그가 그냥 바퀴였을 때는 단지 속도를 섬기는 한 마리 검은 노예일 뿐이었다 날마다 속도에 사육되고 길들어 갔다 다른 속도가 그를 앞질러 갈 때 그는 바르르 떨며 가속 결의를 다져야 했다 자주 바뀌는 공중의 표정 앞에서는 잽싸게 꼬리를 사려야 했다 검고 딱딱한 세계 위에서 세월을 소모하며 제한된 영역만 누려야 했다 지금 저 동그라미는 자신의 일생이 얼마나 속도에 짓눌려 왔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튕겨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예약된 모든 속도들 다 빠져나가고 속도는 한 줌 모래처럼 눈부신 한계였을 뿐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속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에 .. 2004. 9. 22.
세월에 대하여 - 이성복 세월에 대하여 이성복 1 석수石手의 삶은 돌을 깨뜨리고 채소 장수의 삶은 하루 종일 서 있다 몬티를 닮은 내 친구는 동시상영관에서 죽치더니 또 어디로 갔는지 세월은 갔고 세월은 갈 것이고 이천 년 되는 해 아침 나는 손자를 볼 것이다 그래 가야지 천국으로 통하는 차들은 바삐 지나가고 가로수는 줄을 잘 맞춘다 저기, 웬 아이가 쥐꼬리를 잡고 빙빙 돌리며 씽긋 웃는다 세월이여, 얼어붙은 날들이여 야근하고 돌아와 환한 날들을 잠자던 누이들이여 2 피로의 물줄기를 타넘다 보면 때로 이마에 뱀딸기꽃이 피어 오르고 그건 대부분 환영幻影이었고 때로는 정말 형님이 아들을 낳기도 했다 아버지가 으흐허 웃었다 발가벗은 나무에서 또 몇 개의 열매가 떨어졌다 때로는 얼음 깔린 하늘 위로 붉은 말이 연탄을 끌고 갔다 그건 대부.. 2004. 9. 16.
맨발 - 문태준 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2004. 9. 14.
제기동 블루스·1 - 강연호 제기동 블루스·1 강연호 이깐 어둠쯤이야 돌멩이 몇 개로 후익 갈라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막막한 날들이 제기천 썩은 물처럼 고일 때마다 내가 야심껏 던져 넣은 돌멩이들은 지금 어느만큼의 동그라미를 물결 속에 키웠는지 헛된 헤아림 헛된 취기 못 이겨 걸음마다 물음표를 찍곤 하던 귀가길 자취방 문을 열면 저도 역시 혼자라고 툴툴거리다가 지친 식빵 조각이 흩어진 머리칼과 함께 씹히곤 하였다 제기동, 한 집 건너 두 집 건너 하숙과 자취에 익숙했던 한양 유학 동기생들은 이미 모두 떠났지만 도무지 건방졌던 수업시대 못난 반성 때문인지 졸업 후에도 나는 마냥 죽치고 있었다 비듬 같은 페퍼포그와 도서관 늦은 불빛도 그리워하다 보면 이깐 어둠쯤이야 싶었던 객기보다 시대의 아픔이란 게 다만 지리멸렬했다 그런그런 자책과.. 2004. 9. 6.
삼십 대의 病歷 - 이기선 삼십 대의 病歷 이기선 대체로 비가 자주 내렸다 우산은 잘 펴지지 않았고 사랑은 나 를 찾아주지 않았다 인적 끊긴 밤길을 신파조로 걸었다 詩가 되지 않는 말들이 주머니에 넘쳤다 슬픔의 그림자만 휘청이게 하였을 뿐 달빛은 아무 보탬이 되지 않았다 맹세의 말들이 그 믐까지 이어졌다 낮에는 그 공원 벤치에 앉아 낙엽을 헤아렸다 바람이 심하게 훼방을 놓았다 나는 성냥알을 다 긋고도 불을 붙이지 못해 낯 선 사람에게 말을 건네야 했다 담배를 거꾸로 물었다고 그가 일러주었다 쓰고 싶지 않은 말들을 일기에 적었다 뚜껑 열린 만년필은 금 세 말라버렸고 망설였던 흔적이 행간을 메웠다 두 눈을 부릅떴 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앓을 만큼 앓아야 병이 낫던 시절 이었다 / 이기선 / 《시와사람》 2004년 가을호 * sou.. 2004. 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