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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삼십 대의 病歷 - 이기선

by tirol 2004. 9. 2.
삼십 대의 病歷

이기선


대체로 비가 자주 내렸다 우산은 잘 펴지지 않았고 사랑은 나
를 찾아주지 않았다 인적 끊긴 밤길을 신파조로 걸었다 詩가
되지 않는 말들이 주머니에 넘쳤다 슬픔의 그림자만 휘청이게
하였을 뿐 달빛은 아무 보탬이 되지 않았다 맹세의 말들이 그
믐까지 이어졌다
낮에는 그 공원 벤치에 앉아 낙엽을 헤아렸다 바람이 심하게
훼방을 놓았다 나는 성냥알을 다 긋고도 불을 붙이지 못해 낯
선 사람에게 말을 건네야 했다 담배를 거꾸로 물었다고 그가
일러주었다
쓰고 싶지 않은 말들을 일기에 적었다 뚜껑 열린 만년필은 금
세 말라버렸고 망설였던 흔적이 행간을 메웠다 두 눈을 부릅떴
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앓을 만큼 앓아야 병이 낫던 시절
이었다


<삼십 대의 病歷>/ 이기선 / 《시와사람》 2004년 가을호

* source : http://www.poemfire.com


* tirol's thought

요 몇 주 동안,
새삼스럽게 회사 다니기가 싫어졌다.
무의미하고 터무니없는 일들과 무례하거나 무미건조한 사람들 사이에서 괴롭다.
늦은밤, 신경을 쓰면 쓸수록 더욱 또렷하게 들리는 시계소리처럼
한번 싫어지니까 점점 더 싫어지는 듯 하다.

쓰고 싶지 않은 말들을 일기에 적는다.
앓을 만큼 앓고 나면 병이 나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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