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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사론 - 박상천 통사론(統辭論) 박상천 주어와 서술어만 있으면 문장은 성립되지만 그것은 위기와 절정이 빠져버린 플롯같다. '그는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았다.'라는 문장에서 부사어 '우두커니'와 목적어 '그녀를' 제외해버려도 '그는 바라보았다.'는 문장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그는 바라보았다.'는 행위가 뭐 그리 중요한가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나 서술어가 아니라 차라리 부사어가 아닐까 주어와 서술어만으로 이루어진 문장에는 눈물도 보이지 않고 가슴 설레임도 없고 한바탕 웃음도 없고 고뇌도 없다. 우리 삶은 그처럼 결말만 있는 플롯은 아니지 않은가. '그는 힘없이 밥을 먹었다.'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밥을 먹은 사실이 아니라 '힘없이' 먹었다는 것이다. 역사는 주어와 서술어만으로도 이루어지지만 시는 부사어.. 2004. 10. 29.
사막 - 오르탕스 블루 사막 오르탕스 블루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나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désert Hortense Vlou Il se sentait si seul dans ce désert que parfois il marchait à reculons Pour voir quelques tracs devant lui. * tirol's thought 어디선가 읽었는데 (사이트 주소를 잃어버렸다) 프랑스 지하철공사에서 실시한 문예공모 같은데서 뽑힌 시라고 한다. 낯선 사람들로 북적이는 지하철 통로에서 어깨를 부대끼며 걷는 사람이 적막한 사막을 걷는 사람보다 더 외로운 사람은 아닐까. 게다가 그는 뒤로 걸을 수도,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볼 수도 없지 않은가. Tracked from .. 2004. 10. 28.
어두워지기 전에 - 전동균 어두워지기 전에 전동균 얼마나 많이 뒤틀리고 뒤틀러서 깊어져야 사람의 몸 속에서는 물소리가 들려오는가 어두워지기 전에 다시 하늘에서 땅으로 귀환하는 새들처럼, 그 새들을 받아들이며 한없이 넓어지는 땅처럼! * tirol's thought 뒤틀리는 일은 아프다. 그러나 아파야 깊어진다. 얕은 물은 상처를 만든다. 품기 위해선 깊어야 한다. Tracked from http://blog.naver.com/galaxy9501/120002792965 2004. 10. 28.
낙엽 - 이재무 낙엽 이재무 시를 지망하는 학생이 보내온 시 한 편이 나를 울린다 세 행 짜리 짧은 시가 오늘 밤 나를 잠 못 이루게 한다 "한 가지에 나서 자라는 동안 만나지 못하더니 낙엽 되어 비로소 바닥에 한몸으로 포개져 있다" 그렇구나 우리 지척에 살면서도 전화로만 안부 챙기고 만나지 못하다가 누군가의 부음이 오고 경황 중에 달려가서야 만나는구나 잠시잠깐 쓸쓸히 그렇게 만나는구나 죽음만이 떨어져 멀어진 얼굴들 불러모으는구나 * tirol's thought 가을이 되면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부음의 빈도가 늘었다. 무례한 말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결혼식에만 시즌이 있는 게 아니라 장례식에도 시즌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경험 상으로 볼 때 계절이 바뀌는 봄 가을에 돌아가시는 분들이 한여름이나 한 겨울에 비해 훨씬.. 2004. 10. 27.
밥그릇 - 정호승 밥그릇 정호승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 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없이 다 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잇게 먹어보았나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 tirol's thought 어쩌면 내가 하는 고민이란게 허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밥그릇을 핥아보지 않고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지 않고 다른 밥 그릇을 기웃거리거나 저 너머 화단에 핀 꽃이 맛있어보인다고 중얼거리는.. 2004. 10. 21.
마을회관, 접는 의자들 - 이윤학 마을회관, 접는 의자들 이윤학 누가 건드려도 누구의 체중을 받들어도 엄살이 빠져나온다 누가 남의 엄살 따위를 사랑하겠는가 삐걱거리다 버려질 운명을 타고난 녹슨 접는 의자들을 본다, 나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접는 의자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을 선전하지 않는다 접힌 의자들, 칼날이 만든 상처 속에 변치 않는 스펀지를 펼쳐놓고 있다 깨진 창을 찾아드는 햇볕 칠이 벗겨진 곳을, 집중 파고드는 녹을, 접힌 의자들은 무시하고 있다 누군가를 대신해 아파줄 능력을 가진 사람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몇 십 년, 펴진 채로 대신 엄살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회의 시간을 기다렸던가. /이윤학,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 문학과지성시인선 241, 2000/ * tirol's thought 접는.. 2004.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