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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폐(廢)타이어 - 김종현

by tirol 2004. 9. 22.
폐(廢)타이어

김종현


아파트 공터 한 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 있다

그가 그냥 바퀴였을 때는 단지
속도를 섬기는 한 마리 검은 노예일 뿐이었다
날마다 속도에 사육되고
길들어 갔다
다른 속도가 그를 앞질러 갈 때
그는 바르르 떨며
가속 결의를 다져야 했다
자주 바뀌는 공중의 표정 앞에서는
잽싸게 꼬리를 사려야 했다
검고 딱딱한 세계 위에서 세월을 소모하며
제한된 영역만 누려야 했다

지금 저 동그라미는 자신의 일생이
얼마나 속도에 짓눌려 왔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튕겨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예약된 모든 속도들 다 빠져나가고
속도는 한 줌 모래처럼 눈부신 한계였을 뿐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속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에 매달린 세월

그가 속도의 덫에서 풀려나던 날
온몸이 닳도록 달려온 일생을 위로하듯
바람은 그의 몸을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잠시 뒤의 어떤 바람은 풀씨랑 꽃씨를
데리고 와서 놀아주었다
벌레들의 따뜻한 집이 되었다
잃어버린 속도의 기억 한가운데
초록의 꿈들이 자란다
노란 달맞이꽃은 왕관처럼 환히 피어 있다


/200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tirol's thought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그냥 이런 저런 시들을 읽고
마음이 가는 시들을 골라 몇마디 끄적거리는건데
그렇게 고른 시들을 보니까 불쑥 내가 보인다.
후배 K에 말대로,
'고른 시는 다양한 듯 하지만, 결국 감상은 똑같다'
시는 내게 유리창이 아니라 거울인 것 같다.
혹은 시가 유리창인 건 맞는데
내가 그 유리창 너머를 보려들지 않고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만 보려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속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에 매달린 세월'
나는 '튕겨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너무 자주하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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