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읽어주는 남자

제기동 블루스·1 - 강연호

by tirol 2004. 9. 6.
제기동 블루스·1

강연호


이깐 어둠쯤이야 돌멩이 몇 개로
후익 갈라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막막한
날들이 제기천 썩은 물처럼 고일 때마다
내가 야심껏 던져 넣은 돌멩이들은
지금 어느만큼의 동그라미를 물결 속에 키웠는지
헛된 헤아림 헛된 취기 못 이겨
걸음마다 물음표를 찍곤 하던 귀가길
자취방 문을 열면 저도 역시 혼자라고
툴툴거리다가 지친 식빵 조각이
흩어진 머리칼과 함께 씹히곤 하였다
제기동, 한 집 건너 두 집 건너 하숙과
자취에 익숙했던 한양 유학 동기생들은
이미 모두 떠났지만 도무지 건방졌던 수업시대
못난 반성 때문인지 졸업 후에도 나는
마냥 죽치고 있었다 비듬 같은 페퍼포그와
도서관 늦은 불빛도 그리워하다 보면
이깐 어둠쯤이야 싶었던 객기보다
시대의 아픔이란 게 다만 지리멸렬했다
그런그런 자책과 앨범뿐인 이삿짐을 꾸려
어디로든 떠나자고 다짐했을 때
그동안 키운 야심의 동그라미들 흔적 없는
제기천 흐린 물결 속으로
내가 마지막으로 던져 넣은 건
채 부벼 끄지 못한 담뱃불이 고작이었다

/비단길/ 강연호/ 세계사/

*tirol's thought
우리가 '세느강'이라고 불렀던 썩은 제기천.
몇달 동안 얼굴 보기 힘들었던 친구들, 어디선가 신기루처럼 나타나던 제기시장 새벽 골목길.
학교 앞에 놀러온 친구가 '이런 것도 먹냐?'라고 놀라던 형제집의 닭곱창.
외상은 절대로 안되던 닭발집.
그리고 용두동 교회 밑의 그 하숙집.
모두들 안녕하신지.

'시 읽어주는 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월에 대하여 - 이성복  (0) 2004.09.16
맨발 - 문태준  (1) 2004.09.14
삼십 대의 病歷 - 이기선  (2) 2004.09.02
나무 - 안도현  (0) 2004.08.26
돌아오라 소렌토로 - 황인숙  (2) 2004.0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