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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무단횡단 - 김기택

by tirol 2004. 9. 30.
무단횡단

김기택


갑자기 앞차가 급정거했다. 박을 뻔했다.
뒷좌석에서 자던 아이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습관화된 적개심이 욕이 되어 튀어나왔다.

앞차 바로 앞에서 한 할머니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횡단보도가 아닌 도로 복판이었다.
멈춰선 차도 행인도 놀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하고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걷다보니 갑자기 도로와 차들이 생긴 걸음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도저히 빨라지지 않는 걸음이었다.
죽음이 여러 번 과속으로 비껴간 걸음이었다.

그보다 더한 죽음도 숱하게 비껴간 걸음이었다.
속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본 걸음이었다.
이제는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느린 걸음이었다.

걸음이 미처 인도에 닿기도 전에 앞차가 튀어나갔다.
동시에 뒤에 늘어선 차들이 사납게 빵빵거렸다.

<'문학 판' 2003년 겨울호 발표>

*tirol's thought
시인 김기택은 회사원이다.

회사원이라고 해서 다 같은 회사원은 아니겠지만
회사를 다니며 시를 쓰는 시인을 생각하니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나도 시를 쓰고 싶다는 헛된 바램도 품어보게 된다.
회사원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회사원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시를 쓰는 회사원 시인.
그런 시인이 될 수 있다면...
하긴 회사다니는 것도 힘든데 시까지 쓰는 건 무리일지도.

참,
회사다니면서 시쓰는 이 아저씨는 올해 미당문학상까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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