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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세월에 대하여 - 이성복

by tirol 2004. 9. 16.
세월에 대하여

이성복


1
석수石手의 삶은 돌을 깨뜨리고 채소 장수의 삶은
하루 종일 서 있다 몬티를 닮은 내 친구는
동시상영관에서 죽치더니 또 어디로 갔는지
세월은 갔고 세월은 갈 것이고 이천 년 되는 해
아침 나는 손자를 볼 것이다 그래 가야지
천국으로 통하는 차들은 바삐 지나가고
가로수는 줄을 잘 맞춘다 저기, 웬 아이가
쥐꼬리를 잡고 빙빙 돌리며 씽긋 웃는다

세월이여, 얼어붙은 날들이여
야근하고 돌아와 환한 날들을 잠자던 누이들이여

2
피로의 물줄기를 타넘다 보면 때로 이마에
뱀딸기꽃이 피어 오르고 그건 대부분
환영幻影이었고 때로는 정말 형님이 아들을 낳기도
했다 아버지가 으흐허 웃었다 발가벗은
나무에서 또 몇 개의 열매가 떨어졌다 때로는
얼음 깔린 하늘 위로 붉은 말이 연탄을
끌고 갔다 그건 대부분 환영이었고 정말
허리 꺾인 아이들이 철 지난 고추나무처럼
언덕에 박혀 있기도 했다 정말 거세된
친구들이 유행가를 부르며 사라져 갔지만
세월은 흩날리지 않았다 세월은 신다 버린 구두
속에서 곤한 잠을 자다 들키기도 하고
때로는 총알 맞은 새처럼 거꾸로 떨어졌다
아버지는 으흐허 웃고만 있었다 피로의 물줄기를
타넘다 보면 때로 나는 높은 새집 위에서
잠시 쉬기도 하였고 그건 대부분 환영이었다

3
세월은 갔고 아무도 그 어둡고 깊은 노린내 나는
구멍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했다 몇 번인가 되돌아온
편지 해답은 언제나 질문의 잔해였고 친구들은
태엽 풀린 비행기처럼 고꾸라지곤 했다 너무
피곤해 수음手淫을 할 수 없을 때 어른거리던
하얀 풀뿌리 얼어붙은 웅덩이 세월은 갔고
매일매일 작부들은 노래 불렀다 스물세 살,
스물네 살 나이가 담뱃진에 노랗게 물들 때까지
또 나는 열한 시만 되면 버스를 집어 탔고

세월은 갔다 봉제 공장 누이들이 밥 먹는 30분 동안
다리미는 세워졌고 어느 예식장에서나 30분마다
신랑 신부는 바뀌어 갔다 세월은 갔다 변색한
백일 사진 화교華僑들의 공동묘지 싸구려 밥집 빗물
고인 길바닥, 나뭇잎에도 세월은 갔다 한 아이가
세발 자전거를 타고 번잡한 찻길을 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불쌍했고 어떤 사람은 불쌍한
사람을 보고 울었다 아무것도 그 비리고 어지러운
숨 막히는 구멍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했다

4
나는 세월이란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나는 곱게곱게 자라왔고 몇 개의 돌부리 같은
사건들을 제외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그 어려운 수업시대, 욕정과 영웅심과
부끄러움도 쉽게 풍화했다 잊어버릴 것도 없는데
세월은 안개처럼, 취기처럼 올라온다
웬 들 판 이 이 렇 게 넓 어 지 고
얼마나빨간작은꽃들이지평선끝가지아물거리는가

그해
자주 눈이 내리고
빨리 흙탕물로 변해갔다
나는 밤이었다 나는 너와 함께
기차를 타고 민둥산을 지나가고 있
었다 이따금 기차가 멎으면 하얀 물체가
어른거렸고 또 기차는 떠났다.. 세월은 갔다

어쩌면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돌아서
출렁거리는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
너는 발을 동동구르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나는 네가 잠자는 두 평 방이었다
인형 몇 개가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고
액자 속의 교회에서는 종소리가 들리는...
나는 너의 방이었다
네가 바라보는 풀밭이었다
풀밭 옆으로 숨죽여 흐르는 냇물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득 고개를 떨군 네
마음 같은,
한줌
공기였다)

세월이라는 말이 어딘가에서
나를 발견할 때마다
하늘이 눈더미처럼 내려앉고 전깃줄 같은 것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본다 남들처럼
나도 두어 번 연애에 실패했고 그저 실패했을
뿐, 그때마다 유행가가 얼마만큼 절실한지
알았고 노는 사람이나 놀리는 사람이나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세월은
언제나 나보다 앞서 갔고 나는 또 몇 번씩
그 비좁고 습기찬 문간을 지나가야 했다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 tirol's thought

'세월은 갔고,
세월은 갈 것이다.'


속절없이 세월을 탕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두렵다.
특별한 자각증상이 없는 환자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어느날 아침 세월은,
더 이상 수술이 불가능함을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의사처럼
내게 선고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고.

통증은 신경계가 해로운 자극을 받을 때 느끼는
인체의 ‘방어기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병들은 병이 아주 심해질 때까지 통증을 일으키지 않기도 한다.
흔히 '침묵의 장기'라고 불리는 간이 그렇다.
간의 경우 신경세포가 표면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간 중심부에서 암이 시작된 경우엔
병이 아주 심해질 때까지 별다른 증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한다.

육체와 정신은 닮은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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