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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處暑 - 문태준

by tirol 2019. 8. 24.

처서

 

문태준

 

 

 얻어온 개가 울타리 아래 땅 그늘을 파댔다

 짐승이 집에 맞지 않는다 싶어 낮에 다른 집에 주었다

 볕에 널어두었던 고추를 걷고 양철로 덮었는데

 밤이 되니 이슬이 졌다 방충망으로는 여치와 풀벌레가

 딱 붙어서 문설주처럼 꿈적대지 않는다

 가을이 오는가, 삽짝까지 심어둔 옥수숫대엔 그림자가 깊다

 갈색으로 말라가는 옥수수 수염을 타고 들어간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나온다

 가을이 오는가, 감나무는 감을 달고 이파리 까칠하다

 나무에게도 제 몸 빚어 자식을 낳는 일 그런 성싶다

 지게가 집 쪽으로 받쳐 있으면 집을 더메고 간다기에

 달 점점 차가워지는 밤 지게를 산쪽으로 받친다

 이름은 모르나 귀익은 산새소리 알은체 별처럼 시끄럽다

 

<문태준, 수런거리는 뒤란, 2000, 창작과 비평사>

 

* tirol's thought

어제가 처서.

 

"24절기의 14번째로 태양 황경이 150도가 될 때이다. 양력으로는 8월 23일 경, 음력으로는 7월에 해당한다. 여름이 지나 더위가 한풀 꺽이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고 하여 '처서'라 불렀다." - 위키백과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처서'라고 하니 바람이 한결 '선선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문태준 시인은 1994년에 이 시 '처서'외 9편이 '문예중앙'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첫 시집은 2000년 4월에 '수런거리는 뒤란'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는데 이 시는 그 시집 50 페이지에 실려있다. 앞 페이지에 적어 둔 날짜를 보니 내가 시집을 산 날짜는 2000년 11월 6일. 어제는 그 뒤로 19번째 처서. 

 

시인은 '처서' 즈음의 풍경과 정서를 그리고 있는데, 이 시를 인용하는 사람들은 '갈색으로 말라가는 옥수수 수염을 타고 들어간 바람이/ 이빨을 꼭 깨물고 빠져나온다'는 부문을 자주 언급하는 것 같다. 처서에 부는 가을 바람이 느껴지는 멋진 구절이다.

그런데 나는 '얻어온 개가 울타리 아래 땅 그늘을 파댔다/ 짐승이 집에 맞지 않는다 싶어 낮에 다른 집에 주었다'는 첫 두 행에 이상하게 마음이 끌린다. 얻어온 '개'에 내 감정이 실리는 건지, 그 개를 얻어왔다가 다시 다른 집에 주는 '화자'에게 실리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개가 땅 그늘을 파는 걸 보고, 짐승이 집에 맞는 않는다 싶은 생각을 하고, 그래서 다른 집에 주고, 그런 일련의 장면들이 내겐 처서의 가을 바람처럼 느껴진다. '옥수수 수염을 타고 들어간 바람'만큼이나 생생하게. 

 

시집 뒷편에 실린 해설에서 박형준 시인은 문태준의 시를 `제트기가 지나간 뒤의, 제트기가 남기고 간 구름` 같다고 말한다. 시간이, '처서'라는 절기가 제트기라면 이 시는 제트기가 지나간 뒤의, 제트기가 남기고 간 구름 같은 모습을 그린다. 

금새 지워지지 않는, 

그러나 언제가는 지워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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