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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높새바람같이는 - 이영광

by tirol 2019. 8. 31.

높새바람같이는

 

이영광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내겐 지금 높새바람같이는 잘 걷지 못하는 몸이 하나 있고,


높새바람같이는 살아지지 않는 마음이 하나 있고


문질러도 피 흐르지 않는 생이 하나 있네


이것은 재가 되어가는 파국의 용사들


여전히 전장에 버려진 짐승 같은 진심들


당신은 끝내 치유되지 않고


내 안에서 꼿꼿이 죽어가지만,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꾸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이영광, 아픈 천국, 창비, 2010>

 

* tirol's thought

 

'높새바람'은 동해안에서 태백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부는 바람이다. 

늦봄부터 초여름 사이에 부는데

동쪽 산을 타고 오르며 품고 있던 수증기를 거의 비로 내려버려

서쪽 산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은 온도가 높고 매우 건조하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은

'높새바람같이' 잘 걷는 몸과, 살아지는 마음과, 문지르면 피가 흐르는 생이 있던 시절

스치고 지나간 자리의 풀잎을 마르게 할만큼 뜨거웠던 시절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꾸 좋아지던 시절'

 

계절이 바뀌면 바람의 방향과 온도가 바뀌듯

몸도, 마음도, 생도, 시절을 따라 변해간다.

높새바람은 내년 늦봄이 되면 다시 불어 오겠지만

당신과 함께 있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은 

다시 오지 않겠지.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는, 

넝마를 두르지 않아도 따뜻했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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