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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을 불러도 - 전동균

by tirol 2019. 12. 15.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을 불러도 

 

전동균

 

 

산밭에

살얼음이 와 반짝입니다

 

첫눈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고욤나무의 고욤들은 떨어지고

 

일을 끝낸 뒤

저마다의 겨울을 품고

흩어졌다 모였다 다시 흩어지는 연기들

 

빈손이어서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군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왔고

저희는

저희 모습이 비치면 금이 가는 살얼음과도 같으니

 

이렇게 마른 입술로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당신을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전동균,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창비, 2019>

 

* tirol's thouht

 

가을인가 싶더니 어느새 겨울. 

첫눈은 내렸다고 해야할지 아니라고 해야할지 고민이 되지만

'빈손이어서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는' 계절이라는 사실은 분명한 듯 합니다.

한 계절이 가고 다른 계절이 오고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오고.

중학교 생물 시간에 배웠던 것 같은데,

'개체의 발생은 종의 발생을 반복한다'는 얘기처럼

계절의 반복은 생애의 반복을 떠올리게 합니다. 

저무는 생애처럼 잦아드는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부끄러워지는 마음을 어찌해야 할까요

결국은

당신을 불러볼 수 밖에요

마른 입술로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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