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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동백꽃 - 김용택 선운사 동백꽃 김용택 여자에게 버림 받고 살얼음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때문에 그까짓 여자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서서 엉엉 울었다. * tirol's thought 그까짓 사랑때문에 울지 말자...그래 울지 말자...울...지...말...자... 2001. 9. 16.
배를 밀며 - 장석남 배를 밀며 장석남 배를 민다 배를 밀어보는 것은 아주 드문 경험 희번덕이는 잔잔한 가을 바닷물 위에 배를 밀어넣고는 온몸이 아주 추락하지 않을 순간의 한 허공에서 밀던 힘을 한껏 더해 밀어주고는 아슬아슬히 배에서 떨어진 손, 순간 환해진 손을 허공으로부터 거둔다. 사랑은 참 부드럽게도 떠나지 뵈지도 않는 길을 부드럽게도 배를 한껏 세게 밀어내듯이 슬픔도 그렇게 밀어내는 것이지 배가 나가고 남은 빈 물 위의 흉터 잠시 머물다 가라앉고 그런데 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여 아무 소리없이 밀려들어오는 배여 장석남, 왼쪽 가슴아래께에 온 통증, 창작과 비평사, 2000. * tirol's thought 왜 모든 뒷모습은 슬픔인가? 아니 슬픔은 왜 언제나 뒷모습으로 기억되는가? 그녀의 뒷모습. 그녀가 타고 떠나던.. 2001. 9. 16.
배를 매며 - 장석남 배를 매며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일도 없으면서 넋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장석남, 왼쪽 가슴아래께에 온 통증, 창작과 비평사, 2000. * tirol's thought 그래, 사랑은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오듯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 그걸 본능적으로 잡아다 매는 사.. 2001. 9. 16.
스팀목련 - 강연호 스팀목련 강연호 내가 다니던 대학의 문과대 건물 옆엔 스팀목련이 한 그루 있다 해서 진달래 개나리보다 한참은 먼저 핀다 해서 해마다 봐야지 봐야지 겨울난방 스팀에 쐬여 봄날인 듯 피어나는 정말 제철 모르고 어리둥절 피어나는 철부지 목련을 꼭 봐야지 벼르고 벼르다 졸업을 하고 벼르고 벼르다 후딱 십년도 넘어버린 나는 늘 봄날을 놓치고 엎치락뒤치락 추위와 겯고트는 때 아닌 스팀목련도 놓치고 내가 대학 다니던 청춘도 놓치고 내가 대학 다니던 청춘도 놓치고 채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린 나는 늘 나도 놓치고 * 곁고틀다: [시비나 승부를 다툴 때 지지 않으려고]서로 버티어 겨루고 뒤틀다. * tirol's thought 이제 '스팀목련'은 다 졌을게다. 늦겨울에 한 번 보러가야지 했는데... '나도 늘 나를 놓치.. 2001. 9. 16.
사랑 - 김용택 사랑 김용택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이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의 아픔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참된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 2001. 9. 16.
반성 16 - 김영승 반성 16 김영승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김영승, 반성, 민음사, 1987. * tirol's thought 어디에선가 처음 이 시를 보고 그냥 누군가가 끄적여놓은 낙서인 줄 알았다. 하긴, 이게 김영승의 시집 속에 있는 시라는 걸 알게되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시와 낙서사이. 시에는 큰 이미지로 다가오는 시와 한줄의 금언으로 가슴에 꽂히는 시와 감정의 어떤 현을 건드리는 시가 있다. 이렇게 시를 나눈다면 낙서도 그렇지 않겠는가? 이 시도 그냥 웃음이 나오는 낙서 같지만 그냥 무덤덤하게 지나보내고 만 쓸쓸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결심과 후회, .. 2001. 9.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