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663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어느날 古宮(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왕궁) 대신에 王宮(왕궁)의 음탕 대신에 五十(오십)원 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이십)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정서)로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의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제십사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2001. 12. 3.
너라는 햇빛 - 이승훈 너라는 햇빛 이승훈 나는 네 속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바람 부는 세상 너라는 꽃잎 속에 활활 불타고 싶었다 비 오는 세상 너라는 햇빛 속에 너라는 재미 속에 너라는 물결 속에 파묻히고 싶었다 눈 내리는 세상 너라는 봄날 속에 너라는 안개 속에 너라는 거울 속에 잠들고 싶었다 천둥 치는 세상 너라는 감옥에 갇히고 싶었다 네가 피안이었으므로 그러나 이제 너는 터미널 겨울저녁 여섯시 서초동에 켜지는 가로등 내가 너를 괴롭혔다 인연은 바람이다 이제 나같은 인간은 안된다 나 같은 주정뱅이, 취생몽사, 술 나그네, 황혼 나그네 책을 읽지만 억지로 억지로 책장을 넘기지만 난 삶을 사랑한 적이 없다 오늘도 떠돌다 가리라 그래도 생은 아름다웠으므로 이승훈 시집 '너라는 햇빛' 중에서 * tirol's thought 그래도.. 2001. 11. 29.
그랬다지요 - 김용택 그랬다지요 김용택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 tirol's thought 디지털의 특징 중의 하나로 '무한 복제'의 가능성을 들 수 있겠지요. 옮기거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낡거나, 닳는 아날로그와 달리 원본의 변화가 없는 디지털의 복제방식을 생각하다보면 가끔 섬?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저또한 스스로 책을 뒤적여가면서 새 글을 옮기거나 제 글을 쓰기보다 여기 저기에서 시를 복사해다가 올립니다.(이 시도 후배 홈페이지에서...) 생각같아선 올리는 시마다 제 생각이나 느낌을 덧붙여보고 싶긴 한데 그것도 쉽진 않습니다.. 2001. 11. 28.
분지일기 - 이성복 분지일기 이성복 슬픔은 가슴보다 크고 흘러가는 것은 연필심보다 가는 납빛 십자가 나는 내 마음을 돌릴 수 없고 아침부터 해가 지는 분지, 나는 내 마음을 돌릴 수 없고 촘촘히, 촘촘히 내리는 비, 그 사이로 나타나는 한 분 어머니 어머니, 어려운 시절이 닥쳐올 거예요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 울고 있어요 다시 봄이 왔다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류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둥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 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 2001. 11. 24.
먼 곳에서부터 - 김수영 먼 곳에서부터 김수영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 능금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2001. 11. 7.
가을 저녁의 시 - 김춘수 가을 저녁의 시 김춘수 누가 죽어 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 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 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2001. 10.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