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663

쓸쓸한 날에 - 강윤후 쓸쓸한 날에 강윤후 가끔씩 그대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대 떠난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서 부지런히 세상의 식량을 축내고 더없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뻔뻔하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꾸미고 어쩌다 술에 취하면 당당하게 허풍떠는 그 허풍만큼 시시껄렁한 내 나날을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은 그대에게 알리고 싶다. 여전히 의심이 많아서 안녕하고 잠 들어야 겨우 솔직해지는 더러운 치사함 바보같이 넝마같이 구질구질한 내 기다림 그대에게 들려주어 그대의 행복을 치장하고 싶다. 철새만 약속을 지키는 어수선한 세월 조금도 슬프지 않게 살면서 한 치의 미안함 없이 아무 여자에게나 헛된 다짐을 늘어놓지만 힘주어 쓴 글씨가 연필심을 부러뜨리듯 아직도 아편쟁이처럼 그대 기억 모으다 나는 불쑥 헛발을 디디고 부.. 2001. 9. 16.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 2001. 9. 16.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을 뜯어주게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거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닥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2001. 9. 16.
거울 - 이성복 거울 이성복 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죽음속에 우리는 허리까지 잠겨 있습니다 나도 당신도 두렵기만 합니다 이 길은 끝이 있습니까 이 길이 아니라면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길이 아니라면 길은 어디에 당신이 나의 길을 숨기고 있습니까 내가 당신의 길을 가로막았습니까 하루 종일 나는 당신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거울처럼 * tirol's thoughts 오랫동안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동안에 나는 매번 지기만 하는 가위바위보를 하는 소년처럼 줄곧 우울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먼저 '난 주먹을 낼께' '우리 함께 가위를 내는거야' 이런 말들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말들을 믿거나 그 말들을 뒤집어 생각하거나 하였습니다 요.. 2001. 9. 13.
작은 짐승 - 신석정 작은 짐승 신석정 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蘭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蘭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蘭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蘭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이름이 란(蘭)이라는 여자애가 있었다. 안도현 이름의 끝 글자가 '蘭'인 여자애가 있었다.. 2001. 9. 13.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 태양보다 냉철한 뭇 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 시집 '황금빛 모서리'(문학과 지성사)에서 * tirol's thought 1995년께던가? '안암문예창작강좌'라는 모임에 초청 시인으로 왔던 김중식을 기억한다. '백수'로서 시쓰기...친구들과의.. 2001. 9.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