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672 스팀목련 - 강연호 스팀목련 강연호 내가 다니던 대학의 문과대 건물 옆엔 스팀목련이 한 그루 있다 해서 진달래 개나리보다 한참은 먼저 핀다 해서 해마다 봐야지 봐야지 겨울난방 스팀에 쐬여 봄날인 듯 피어나는 정말 제철 모르고 어리둥절 피어나는 철부지 목련을 꼭 봐야지 벼르고 벼르다 졸업을 하고 벼르고 벼르다 후딱 십년도 넘어버린 나는 늘 봄날을 놓치고 엎치락뒤치락 추위와 겯고트는 때 아닌 스팀목련도 놓치고 내가 대학 다니던 청춘도 놓치고 내가 대학 다니던 청춘도 놓치고 채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린 나는 늘 나도 놓치고 * 곁고틀다: [시비나 승부를 다툴 때 지지 않으려고]서로 버티어 겨루고 뒤틀다. * tirol's thought 이제 '스팀목련'은 다 졌을게다. 늦겨울에 한 번 보러가야지 했는데... '나도 늘 나를 놓치.. 2001. 9. 16. 사랑 - 김용택 사랑 김용택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이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가능할 수 있는 것들을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 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당신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래도 마음의 아픔은 어찌하지 못합니다. 계절이 옮겨가고 있듯이 제 마음도 어디론가 옮겨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의 끝에서 희망의 파란 봄이 우리 몰래 우리 세상에 오듯이 우리들의 보리들이 새파래지고 어디선가 또 새 풀이 돋겠지요. 이제 생각해보면 당신도 이 세상 하고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을 잊으려 노력한 지난 몇 개월 동안 아픔은 컸으나 참된 아픔으로 세상이 더 넓어져 세상만사가 .. 2001. 9. 16. 반성 16 - 김영승 반성 16 김영승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김영승, 반성, 민음사, 1987. * tirol's thought 어디에선가 처음 이 시를 보고 그냥 누군가가 끄적여놓은 낙서인 줄 알았다. 하긴, 이게 김영승의 시집 속에 있는 시라는 걸 알게되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시와 낙서사이. 시에는 큰 이미지로 다가오는 시와 한줄의 금언으로 가슴에 꽂히는 시와 감정의 어떤 현을 건드리는 시가 있다. 이렇게 시를 나눈다면 낙서도 그렇지 않겠는가? 이 시도 그냥 웃음이 나오는 낙서 같지만 그냥 무덤덤하게 지나보내고 만 쓸쓸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결심과 후회, .. 2001. 9. 16. 쓸쓸한 날에 - 강윤후 쓸쓸한 날에 강윤후 가끔씩 그대에게 내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대 떠난 뒤에도 멀쩡하게 살아서 부지런히 세상의 식량을 축내고 더없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뻔뻔하게 들키지 않을 거짓말을 꾸미고 어쩌다 술에 취하면 당당하게 허풍떠는 그 허풍만큼 시시껄렁한 내 나날을 가끔씩 그래, 아주 가끔씩은 그대에게 알리고 싶다. 여전히 의심이 많아서 안녕하고 잠 들어야 겨우 솔직해지는 더러운 치사함 바보같이 넝마같이 구질구질한 내 기다림 그대에게 들려주어 그대의 행복을 치장하고 싶다. 철새만 약속을 지키는 어수선한 세월 조금도 슬프지 않게 살면서 한 치의 미안함 없이 아무 여자에게나 헛된 다짐을 늘어놓지만 힘주어 쓴 글씨가 연필심을 부러뜨리듯 아직도 아편쟁이처럼 그대 기억 모으다 나는 불쑥 헛발을 디디고 부.. 2001. 9. 16.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 2001. 9. 16.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늙어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을 뜯어주게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거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닥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2001. 9. 16. 이전 1 ··· 107 108 109 110 111 11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