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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동에서 - 김혜순 전염병동에서 김혜순 화창한 여름 날 희디흰 방에 네 개의 섬이 조용히 떠 있었읍니다. 그러던 어느 바람 몹시 세던 날 외로운 섬 하나 그만 파도에 묻혀 버렸습니다. 남겨진 섬들이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억울하다 억울하다 말했읍니다. 그리고 또 다음다음 날인가 빛 벌레들이 희디흰 섬의 옷자락에 내려앉던 그날 그만 두 개의 섬도 차례로 파도에 먹혀 버렸읍니다. 이제 홀로 남은 섬 하나는 이불 자락을 입 속 깊이 쑤셔박으며 되돌아 누웠습니다. 홀로 남은 내 발가락 사이로 희디흰 파도들이 찰랑거리며 드나드는 것이 보였읍니다. 문학과 지성사 시인선 17, 김혜순 시집 '또 다른 별에서'/ * tirol's thought '홀로 남아 이불 자락을 입 속 깊이 쑤셔박으며 되돌아 눕는' 섬 이라는 구절때문에 오랫 동안 .. 2001. 9. 16.
방죽 위에 서서 - 김갑수 방죽 위에 서서 김갑수 그러나 사랑에는 순탄하든 험악하든 모두 제 갈길이 있는 것인데 이 사랑은 전혀 그런 길이 없는 것이에요 때로 방죽 위에 서서 저무는 하루를 굽어봅니다 날은 느릿느릿 멀어져가고 여울에 휩쓸린 물풀의 머리칼이 흔들립니다 바람에 내맡긴 이마를 흔들리는 머릿결이 덮어줍니다 새로 오는 하루는 언제나 처음인 양 하지만 하루의 전모는 마침내 습관일 뿐이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언제나 처음인 양 마음 가는 대로 기울고 흔들리던 분별없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분별이 없어서 가문 들녘에 억새풀들만 웃자라는지 웃자라는 만남의 기억이 마른 살갗에 문신으로 따금뜨금 새겨집니다 이렇게 방죽 위에 오래 서서 떠나는 하루를 바라봅니다 아스라한 저 언덕 너머에 가여운 만남이 있었다고 저녁 하늘에는 병 깊어 어두운 별들.. 2001. 9. 16.
절망 - 김수영 절망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김수영,'김수영 전집1-시',민음사, * tirol's thought 내 친구 종인이의 책꽂이에는 아마 이 시가 실려있는 '김수영 전집1-시'가 꽂혀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내 책꽂이에도. 사실 종인이에게 선물한 책은 원래 내가 보려고 샀던 책이었다. 그걸 종인이에게 선물하고 한참 뒤에 다시 똑같은 책을 샀다. 한번 내 손에 들어왔던, 그리고 머물렀던 책을 다시 산다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대학시.. 2001. 9. 16.
울고 있는 가수 - 허수경 울고 있는 가수 허수경 가수는 노래하고 세월은 흐른다 사랑아, 가끔 날 위해 울 수 있었니 그러나 울 수 있었던 날들의 따뜻함 나도 한때 하릴없이 죽지는 않겠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돌담에 기대 햇살처럼 번진 적도 있었다네 맹세는 따뜻함처럼 우리를 배반했으나 우는 철새의 애처러움 우우 애처러움을 타는 마음들 우우 마음들 가여워라 마음을 빠져나온 마음이 마음에게로 가기 위해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일들은 나를 울게 한다 울 수 있음의 따뜻했음 사랑아, 너도 젖었니 감추어두었던 단 하나, 그리움의 입구도 젖었니 잃어버린 사랑조차 나를 떠난다 무정하니 세월아, 저 사랑의 찬가 허수경 시집 '혼자 가는 먼집' (문학과 지성사, 1992) * tirol's thought 지금 허수경은 서울에 없다. 독일 어딘가.. 2001. 9. 16.
사평역에서 - 곽재구 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 2001. 9. 16.
밥 먹는 법 - 정호승 밥 먹는 법 정호승 밥상 앞에 무릎을 꿇지 말 것 눈물로 만든 밥보다 모래로 만든 밥을 먼저 먹을 것 무엇보다도 전시된 밥은 먹지 말 것 먹더라도 혼자 먹을 것 아니면 차라리 굶을 것 굶어서 가벼워질 것 때때로 바람부는 날이면 풀잎을 햇살에 비벼 먹을 것 그래도 배가 고프면 입을 없앨 것 창비시선 161,정호승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 tirol's thought 똑같은 시를 신문에서 읽을 때와 시집에서 읽을 때의 느낌은 많이 다르다. 이 시는 신문에서 먼저 읽었다. 그리고 나중에 시집을 샀는데 시집에서 읽는 시는 맛이 나지 않았다. 혼자 밥을 먹으며 습관적으로 펴는 신문. 흥미있는 기사가 없어도, 그냥 아무 생각없이 읽어내려가는 글자들.먹고 살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밥상 앞에 무릎도 꿇고,.. 2001. 9.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