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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472

저녁길 - 김광규 저녁길 김광규 날 생각을 버린 지는 이미 오래다 요즘은 달리려 하지도 않는다 걷기조차 싫어 타려고 한다 (우리는 주로 버스나 전철에 실려 다니는데 ) 타면 모두들 앉으려 한다 앉아서 졸며 기대려 한다 피곤해서가 아니다 돈벌이가 끝날때마다 머리는 퇴화하고 온 몸엔 비늘이 돋고 피는 식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눈을 반쯤 감은 채 익숙한 발걸음은 집으로 간다 우리는 매일 저녁 집으로 돌아간다 파충류처럼 늪으로 돌아간다 * tirol's thought 오늘 아침도 나는 돈벌이를 위해 늪에서 나왔다. 이제 그만 날 생각 따위는 버리라고 은근하지만 끈덕지게 설득하는 주변 파충류들의 얘기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 날아보고 싶다. 늪으로 돌아가는 퇴근길, 졸린 눈을 부릅뜨고 소설책을 읽는 나는 쉽게 피가 식지 않는 철없.. 2004. 10. 5.
바람은 그대 쪽으로 - 기형도 바람은 그대 쪽으로 기형도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靈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短篇의 잠속에서 끼여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 2004. 10. 4.
무단횡단 - 김기택 무단횡단 김기택 갑자기 앞차가 급정거했다. 박을 뻔했다. 뒷좌석에서 자던 아이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습관화된 적개심이 욕이 되어 튀어나왔다. 앞차 바로 앞에서 한 할머니가 길을 건너고 있었다. 횡단보도가 아닌 도로 복판이었다. 멈춰선 차도 행인도 놀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하고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걷다보니 갑자기 도로와 차들이 생긴 걸음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도저히 빨라지지 않는 걸음이었다. 죽음이 여러 번 과속으로 비껴간 걸음이었다. 그보다 더한 죽음도 숱하게 비껴간 걸음이었다. 속으로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본 걸음이었다. 이제는 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느린 걸음이었다. 걸음이 미처 인도에 닿기도 전에 앞차가 튀어나갔다. 동시에 뒤에 늘어선 차들이 사납게 빵빵거렸다. *tirol'.. 2004. 9. 30.
폐(廢)타이어 - 김종현 폐(廢)타이어 김종현 아파트 공터 한 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 있다 그가 그냥 바퀴였을 때는 단지 속도를 섬기는 한 마리 검은 노예일 뿐이었다 날마다 속도에 사육되고 길들어 갔다 다른 속도가 그를 앞질러 갈 때 그는 바르르 떨며 가속 결의를 다져야 했다 자주 바뀌는 공중의 표정 앞에서는 잽싸게 꼬리를 사려야 했다 검고 딱딱한 세계 위에서 세월을 소모하며 제한된 영역만 누려야 했다 지금 저 동그라미는 자신의 일생이 얼마나 속도에 짓눌려 왔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튕겨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예약된 모든 속도들 다 빠져나가고 속도는 한 줌 모래처럼 눈부신 한계였을 뿐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속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에 .. 2004. 9. 22.
세월에 대하여 - 이성복 세월에 대하여 이성복 1 석수石手의 삶은 돌을 깨뜨리고 채소 장수의 삶은 하루 종일 서 있다 몬티를 닮은 내 친구는 동시상영관에서 죽치더니 또 어디로 갔는지 세월은 갔고 세월은 갈 것이고 이천 년 되는 해 아침 나는 손자를 볼 것이다 그래 가야지 천국으로 통하는 차들은 바삐 지나가고 가로수는 줄을 잘 맞춘다 저기, 웬 아이가 쥐꼬리를 잡고 빙빙 돌리며 씽긋 웃는다 세월이여, 얼어붙은 날들이여 야근하고 돌아와 환한 날들을 잠자던 누이들이여 2 피로의 물줄기를 타넘다 보면 때로 이마에 뱀딸기꽃이 피어 오르고 그건 대부분 환영幻影이었고 때로는 정말 형님이 아들을 낳기도 했다 아버지가 으흐허 웃었다 발가벗은 나무에서 또 몇 개의 열매가 떨어졌다 때로는 얼음 깔린 하늘 위로 붉은 말이 연탄을 끌고 갔다 그건 대부.. 2004. 9. 16.
맨발 - 문태준 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2004. 9.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