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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472

애수의 소야곡 - 진이정 애수의 소야곡 진이정 아버지를 이해할 것만 같은 밤, 남인수와 고복수의 팬이던 아버지는 내 사춘기의 송창식을 끝내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것만 같은 밤, 나는 또 누구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부턴 열린 마음으로 살고 싶었다 이 순간까지도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 그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즐기려고 애써 왔다 허나 당신을 이해할 것만 같은 밤이 자주 찾아오기에 나는 두렵다 나는 무너지고 있는 것일까 이해한다, 라고 똑 떨어지게 말할 날이 백발처럼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닐까 그의 추억이던 왜정 때의 카페와 나의 카페는 그 철자만이 일치할 뿐, 그러나 그런 중첩마저, 요즘의 내겐 소중히 여겨진다 아버지의 카바레와 나의 재즈 바는 그 무대만이 함께 휘황할 뿐 그러나 나는 사교춤을 출 줄 .. 2004. 11. 8.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 이기철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이기철 내 몸은 낡은 의자처럼 주저앉아 기다렸다 병은 연인처럼 와서 적처럼 깃든다 그리움에 발 담그면 병이 된다는 것을 일찍 안 사람은 현명하다 나, 아직도 사람 그리운 병 낫지 않아 낯선 골목 헤맬 때 등신아 등신아 어깨 때리는 바람소리 귓가에 들린다 별 돋아도 가슴 뛰지 않을 때까지 살 수 있을까 꽃잎 지고 나서 옷깃에 매달아 둘 이름 하나 있다면 아픈 날들 지나 아프지 않은 날로 가자 없던 풀들이 새로 돋고 안보이던 꽃들이 세상을 채운다 아,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삶보다는 훨씬 푸르고 생생한 생 그러나 지상의 모든 것은 한번은 생을 떠난다 저 지붕들, 얼마나 하늘로 올라 가고 싶었을까 이 흙먼지 밟고 짐승들, 병아리들 다 떠날 때까지 병을 사랑하.. 2004. 11. 5.
달의 눈물 - 함민복 달의 눈물 함민복 금호동 산동네의 밤이 깊다 고단한 하루를 마친 사람들이 노루들의 잠자리나 되었을 법한 산속으로 머리를 눕히러 찾아드는 곳 힘들여 올라왔던 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몸 더럽히고 흘러내리는 하수도 물소리 숨찬 산중턱에 살고 있는 나보다 더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많아 아직 잠 못 이룬 사람들 많아 하수도 물소리 골목길 따라 흘러내린다 전봇대 굵기만한 도랑을 덮은 쇠철망 틈새로 들려오는 하수도 물소리 누가 때늦은 목욕을 했는지 제법 소리가 커지기도 하며 산동네의 삶처럼 경사가 져 썩은내 풍길 새도 없이 흘러내리는 하수도 물소리 또 비린내가 좀 나면 어떠랴 그게 사람 살아가는 증표일진대 이곳 삶의 동맥처럼 새벽까지 끊기지 않고 흐르는 하수도 물소리 물소리 듣는 것은 즐겁다 쇠철망 앞에 쭈그려 .. 2004. 11. 3.
사향 - 김상옥 사향 김상옥 눈을 가만 감으면 굽이 잦은 풀밭 길이 개울물 돌돌돌 길섶으로 흘러가고 백양 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이구요 송아지 몰고 오며 바라 보던 진달래도 저녁 노을처럼 산을 들러 퍼질 것을 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러운 꽃지짐 어질고 고운 그들 멧남새도 캐어 오리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감았던 그 눈을 뜨면 마음 도로 애젓하오 * tirol's thought 지난 31일. 시인의 아내가 죽자 시인은 곡기를 끊고 엿새만에 세상을 버렸다 한다. 몇해 전 세상을 떠난 시인 서정주도 아내를 잃은 후 두달 동안 술만 마시다 그렇게 된 것이라 한다. 오래도록 아내와 해로한 '노인'이기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보다 더깊이 슬픔을 느끼는 '시인'이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 블로거의 말대로 '84세.. 2004. 11. 2.
통사론 - 박상천 통사론(統辭論) 박상천 주어와 서술어만 있으면 문장은 성립되지만 그것은 위기와 절정이 빠져버린 플롯같다. '그는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았다.'라는 문장에서 부사어 '우두커니'와 목적어 '그녀를' 제외해버려도 '그는 바라보았다.'는 문장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그는 바라보았다.'는 행위가 뭐 그리 중요한가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나 서술어가 아니라 차라리 부사어가 아닐까 주어와 서술어만으로 이루어진 문장에는 눈물도 보이지 않고 가슴 설레임도 없고 한바탕 웃음도 없고 고뇌도 없다. 우리 삶은 그처럼 결말만 있는 플롯은 아니지 않은가. '그는 힘없이 밥을 먹었다.'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밥을 먹은 사실이 아니라 '힘없이' 먹었다는 것이다. 역사는 주어와 서술어만으로도 이루어지지만 시는 부사어.. 2004. 10. 29.
사막 - 오르탕스 블루 사막 오르탕스 블루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나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désert Hortense Vlou Il se sentait si seul dans ce désert que parfois il marchait à reculons Pour voir quelques tracs devant lui. * tirol's thought 어디선가 읽었는데 (사이트 주소를 잃어버렸다) 프랑스 지하철공사에서 실시한 문예공모 같은데서 뽑힌 시라고 한다. 낯선 사람들로 북적이는 지하철 통로에서 어깨를 부대끼며 걷는 사람이 적막한 사막을 걷는 사람보다 더 외로운 사람은 아닐까. 게다가 그는 뒤로 걸을 수도,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볼 수도 없지 않은가. Tracked from .. 2004. 10.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