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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바람은 그대 쪽으로 - 기형도

by tirol 2004. 10. 4.
바람은 그대 쪽으로

기형도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靈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短篇의 잠속에서 끼여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生의 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燈皮를 다 닦아내는 薄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 내는 희미한 길...외롭다...내 낮은 기침소리가 그대 短篇의 잠속에서 끼여들 때면...내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소리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꺽는다...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의 僻地 를 조용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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