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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472

제기동 블루스·1 - 강연호 제기동 블루스·1 강연호 이깐 어둠쯤이야 돌멩이 몇 개로 후익 갈라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막막한 날들이 제기천 썩은 물처럼 고일 때마다 내가 야심껏 던져 넣은 돌멩이들은 지금 어느만큼의 동그라미를 물결 속에 키웠는지 헛된 헤아림 헛된 취기 못 이겨 걸음마다 물음표를 찍곤 하던 귀가길 자취방 문을 열면 저도 역시 혼자라고 툴툴거리다가 지친 식빵 조각이 흩어진 머리칼과 함께 씹히곤 하였다 제기동, 한 집 건너 두 집 건너 하숙과 자취에 익숙했던 한양 유학 동기생들은 이미 모두 떠났지만 도무지 건방졌던 수업시대 못난 반성 때문인지 졸업 후에도 나는 마냥 죽치고 있었다 비듬 같은 페퍼포그와 도서관 늦은 불빛도 그리워하다 보면 이깐 어둠쯤이야 싶었던 객기보다 시대의 아픔이란 게 다만 지리멸렬했다 그런그런 자책과.. 2004. 9. 6.
삼십 대의 病歷 - 이기선 삼십 대의 病歷 이기선 대체로 비가 자주 내렸다 우산은 잘 펴지지 않았고 사랑은 나 를 찾아주지 않았다 인적 끊긴 밤길을 신파조로 걸었다 詩가 되지 않는 말들이 주머니에 넘쳤다 슬픔의 그림자만 휘청이게 하였을 뿐 달빛은 아무 보탬이 되지 않았다 맹세의 말들이 그 믐까지 이어졌다 낮에는 그 공원 벤치에 앉아 낙엽을 헤아렸다 바람이 심하게 훼방을 놓았다 나는 성냥알을 다 긋고도 불을 붙이지 못해 낯 선 사람에게 말을 건네야 했다 담배를 거꾸로 물었다고 그가 일러주었다 쓰고 싶지 않은 말들을 일기에 적었다 뚜껑 열린 만년필은 금 세 말라버렸고 망설였던 흔적이 행간을 메웠다 두 눈을 부릅떴 지만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앓을 만큼 앓아야 병이 낫던 시절 이었다 / 이기선 / 《시와사람》 2004년 가을호 * sou.. 2004. 9. 2.
나무 - 안도현 나무 안도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시사철 나무가 버티는 것은 귀빰을 폭풍한테 얻어맞으면서 이리저리 머리채를 잡힌 채 전전긍긍하면서도 기어이, 버티는 것은 자기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버티는 것을 이제 막 꼼지락꼼지락 잎을 내밀기 시작하는 어린 나무들에게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훗날 이 세상을 나무의 퍼덕거림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버티는 게 나무의 교육관이다 낮은 곳을 내려다볼 줄 아는 것, 가는 데까지 가보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온 몸으로 가르쳐 주며 나무는 버틴다 나무라고 왜 가지가지 신경통을 모르겠으며 잎사귀마다 서러움으로 울컥일 때가 왜 없었겠는가 죽어버릴 테야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 휘저어 보던 날도 있었을 것이다 트럭을 탄 벌목꾼들이 당도하기 전에 그냥 푹, 고꾸라져.. 2004. 8. 26.
돌아오라 소렌토로 - 황인숙 돌아오라 소렌토로 황인숙 집이 무너지니 그 길로 하늘이 열리는구나 그리운 그 빛난 햇살 갇혀 있던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구나 안녕, 나의 뭉게 영혼 生이 짙게 다가온다, 마치 면도날에 살을 베면 의혹에 차서 하얗게 침묵하고 있다가 서서히 배어나는 피같이 향기로운 꽃 만발한. /황인숙 시집 중에서/ *tirol's thought 무너진 집 그 길로 열리는 하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영혼. 의혹에 차서 하얗게 침묵하고 있다가 서서히 배어나는 피. 뭉게뭉게 피어올라서 뭘 어쩌자는 거냐고, 그냥 피가 나는 것과 하얗게 침묵하고 있다가 서서히 배어나는 피가 어떻게 다른 거냐고 만약에 다른 거라고 해도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냐고, 묻지 마시라. 돌아오라 소렌토로라는 제목과 나의 뭉게 영혼과 향기로운 꽃처럼 만발.. 2004. 8. 24.
제부도 - 이재무 제부도 이재무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 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 그 거리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손 뻗으면 닿을 듯, 그러나 닿지는 않고, 눈에 삼삼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깊이 말인가? 제부도와 대부도 사이 가득 채운 바다의 깊이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그리움 만조로 가득 출렁거리는, 간조 뒤에 오는 상봉의 길 개화처럼 열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말인가? 이별 말인가? 하루에 두 번이나 되지 않겠나 아주 섭섭지는 않게 아주 물리지는 않게 자주 서럽고 자주 기쁜 것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자랑스러운 변덕이라네 * tirol's thought 나는 제부도와 대부도 사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언젠가부터 한번쯤 가봐야겠다고 계속 생각만 하고 있는데 실제로 언제 가보게 될지 모르겠다. 영영 가지 않고 그리워만 할.. 2004. 8. 23.
매미 - 이정록 매미 이정록 여름 내내, 매미는 숲속 가득 전기면도기를 돌린다 철망 밖으로 칼을 내밀지 않고도 날을 돌려 푸른 수염을 깎는다 여름의 끝, 된서리가 몇 차례 땅의 살을 그은 뒤에야 면도를 마치고 나무에서 내려온다 그러나 벌써 겨울이다 살점의 마른 잎 위에 하늘은 다시 비누거품을 풀어놓는다 그 첩첩의 눈 속에는, 언제부턴가 흙에 코드를 꽂고 주름주름 충전을 하는 굼벵이들 봄을 향해 언땅을 흔들고 있다 * tirol's thought 시인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사람이다. 때론 아주 큰 시야로 때론 아주 세밀하게 때론 아주 삐딱하게. 시인은 한여름 매미 소리에서 면도기 소리를 생각해내고 겨울의 눈에서 비누거품을 본다. 시인의 눈은 땅 위에 있지 않다 저 멀리 높은 곳에 있다. 대지의 얼굴을 뒤덮은 눈으로 된 비.. 2004.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