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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 이기철

by tirol 2004. 11. 5.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이기철


내 몸은 낡은 의자처럼 주저앉아 기다렸다
병은 연인처럼 와서 적처럼 깃든다
그리움에 발 담그면 병이 된다는 것을
일찍 안 사람은 현명하다
나, 아직도 사람 그리운 병 낫지 않아
낯선 골목 헤맬 때
등신아 등신아 어깨 때리는 바람소리 귓가에 들린다
별 돋아도 가슴 뛰지 않을 때까지 살 수 있을까
꽃잎 지고 나서 옷깃에 매달아 둘 이름 하나 있다면
아픈 날들 지나 아프지 않은 날로 가자
없던 풀들이 새로 돋고
안보이던 꽃들이 세상을 채운다
아,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삶보다는 훨씬 푸르고 생생한 생
그러나 지상의 모든 것은 한번은 생을 떠난다
저 지붕들, 얼마나 하늘로 올라 가고 싶었을까
이 흙먼지 밟고 짐승들, 병아리들 다 떠날 때까지
병을 사랑하자, 병이 생이다
그 병조차 떠나고 나면, 우리
무엇으로 밥 먹고 무엇으로 그리워 할 수 있느냐


* tirol's thought

몇 달 전부터 목 아래쪽이 뜨끔거리는데다
답답한 가래가 자꾸 생겨서 병원엘 다녀왔다.
혼자 생각하기는
담배를 끊으면서 생기는 금단증상이겠거니 했는데
의사는 '역류성 후두염'으로 진단했다.
위장에서 분비되는 위산이
후두 쪽으로 역류되어 생기는 병이라고 한다.
병원에서 돌아와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비슷한 증상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다.
당장 일상 생활에 지장이 있을만큼
심각한 통증이나 불편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치료기간도 오래 걸리고 쉽게 재발하는 병.
하긴 생각해보면 이런 병들이 얼마나 많은지.
미워도 어쩔 수 없이
평생을 끼고 살아야 하는 못난 피붙이같은,
잊을만하면 불쑥 찾아와
평안하다고 믿고 지내던 일상을 뒤흔드는
오래된 건달 친구같은,
그런 병들.

의사가 말하길 병이 나으려면
지금 당장 담배 끊고,
카페인이 들어간 커피, 녹차, 홍차, 초콜릿 먹지말고,
콜라, 사이다 같은 청량음료 피하고,
고기, 버터, 치즈, 계란, 튀긴 음식 같은 거 먹지 말고
식사 후 바로 눕지 말고,
잠자리 들기 세시간 전엔 아무것도 먹지말고,
꽉 끼는 옷 입지 말고,
특히 저녁에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는데...
(그럼 낮에 먹는 건 괜찮나?
의사들은 과연 이런 얘기 환자에게 하면서
환자들이 자기가 한 얘기를
다 지킬 수 있을꺼라 믿을까?)

나는 역시
의사의 처방보다
시인의 처방이 훨씬 마음에 든다.

병을 사랑하자, 병이 생이다
그 병조차 떠나고 나면, 우리
무엇으로 밥 먹고 무엇으로 그리워 할 수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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