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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472

눈 오는 날 콩나물국밥집에서 - 복효근 눈 오는 날 콩나물국밥집에서 복효근 눈이 뿌리기 시작하자 나는 콩나물국밥집에서 혼자 앉아 국밥을 먹는다 입을 데는 줄도 모르고 시들어버린 악보 같은 노란 콩나물 건더기를 밀어넣으며 이제 아무도 그립지도 않을 나인데 낼모레면 내 나이가 사십이고 밖엔 눈이 내린다 이런 날은 돈을 빌려달라는 놈이라도 만났으면 싶기도 해서 다만 나는 콩나물이 덜 익어 비릿하다고 투정할 뿐인데 자꾸 눈이 내리고 탕진해버린 시간들을 보상하라고 먼 데서 오는 빚쟁이처럼 가슴 후비며 어쩌자고 눈은 내리고 국밥 한 그릇이 희망일 수 있었던, 술이 깨고 술 속이 풀려야 할 이유가 있던 그 아픈 푸른 시간들이 다시 오는 것이냐 눈송이 몇 개가 불을 지펴놓는 새벽 콩나물국밥집에서 풋눈을 맞던 기억으로 다시 울 수 있을까 다시 그 설레임으로 .. 2004. 12. 23.
그림자 - 정현종 그림자 정현종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그림자가 물에 비쳤다. 나는 그 물을 액자에 넣어 마음에 걸어놓았다. 바라볼 때마다 그림자들은 물결에 흔들렸다. 그리고 나는 그림자들보다 더 흔들렸다. /정현종, 세상의 나무들, 문학과지성사, 1995/ * tirol's thought 물에 비친 사람들의 그림자. 마음에 걸어놓은 액자 속의 물. 물결에 흔들리는 그림자, 그리고 그림자들보다 더 흔들리는 나. 흔들리는 물, 그림자, 나. 죽음의 이미지. 이 세상이 끊임없이 흔들리는 곳이라면 오히려 흔들림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2004. 12. 22.
그는 - 정호승 그는 정호승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 tirol's thought 흐르는 시간을 따라 시에 대한 취향도 바뀌는 것 같다. 정호승의 시를 예로 들자면 한참 그의 시를 좋아하던 시절에 비해 관심의 정도가.. 2004. 12. 21.
구두 밑에서 말발굽 소리가 난다 - 손택수 구두 밑에서 말발굽 소리가 난다 손택수 구두 밑에서 따그락 따그락 말발굽 소리가 난다 구두를 벗어 보니 구두 뒷굽에 구멍이 났다 닳을 대로 닳은 구두 뒷굽을 뚫고 들어간 돌멩이들이 부딪히며 걸을 때마다 챙피한 소리를 낸다 바꿔야지, 바꿔야지 작심하고 다닌 게 몇 달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체념하고 다닌 게 또 몇 달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광주로 마산으로, 다시 부산으로 떠돌아다니는 동안 빗물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구두 빙판길에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엄지발가락에 꾸욱 힘을 줘야 했던 구두 걸을 때마다 말발굽 소리를 낸다 빼고 나면 다시 들어가 박히고 빼고 나면 또 다시 들어가 박히는 소리 지친 걸음에 박자를 맞춰주는 소리 닳고 닳은 발굽으로 열 정거장 스무 정거장 빈주머니에 빈손을 감추고 걸어.. 2004. 12. 20.
어머니의 편지 - 세르게이 예세닌 어머니의 편지 세르게이 예세닌 이제 뭘 더 생각할 게 있겠는가, 이제 뭘 더 쓸 게 있겠는가? 내 눈 앞 우울한 책상 위에 놓여진 어머니의 편지. 어머니는 이렇게 쓰신다. “될 수 있으면 말이다, 얘야, 크리스마스 때 우리한테 내려오려무나. 내게는 목도리를 하나 사주고, 아버지께는 바지를 한 벌 사다오. 집에는 부족한 게 너무 많단다. 네가 시인이라는 거, 좋지 않은 평판만 얻고 있는 거, 난 정말이지 못마땅하다. 차라리 네가 어릴 적부터 뜰로 쟁기나 몰고 다녔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나도 이젠 늙었고 몸도 영 좋지 않단다 ........ 사랑하는 내 아들아, 대체 네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 그토록 얌전하고, 그토록 순한 아이였는데. 모두들 앞을 다퉈 말하곤 했지. 저 아이 아버지는 얼마나 행복할까.. 2004. 12. 16.
마음아, 네가 쉴 곳은 내 안에 없다 - 김기택 마음아, 네가 쉴 곳은 내 안에 없다 김기택 누웠다 일어났다 먹다 신문을 보다 티브이를 보다 자다 하는 일밖에 할 일이 없을 때 몸은 하나의 정교한 물시계 같다 미세한 방광의 눈금으로 한 방울 두 방울 몸이 버린 물들이 고이는 것이 느껴진다 눈금이 모두 채워지면 방광에 종이 울린다 그때는 아무리 게으른 몸뚱이라도 정확하게 몸을 일으켜 오줌을 누어야 한다 물시계가 죽지 않도록 물을 잘 쏟아야 한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꼬박꼬박 먹고 마시는데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몸무게는 그대로다 그 동안 먹은 밥 마신 물 모두 어디로 갔나 대부분 배설물 분비물로 빠져나갔겠지만 머리카락이 되어 깍이고 손톱 발톱이 되어 깍이고 때가 되어 밀려나가고 기운을 써서 소모시켜 버렸겠지만 더러는 말이 되어 입에서 새어나가지 않았을까 .. 2004.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