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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어머니의 편지 - 세르게이 예세닌

by tirol 2004. 12. 16.
어머니의 편지

세르게이 예세닌


이제
뭘 더 생각할 게 있겠는가,
이제 뭘 더 쓸 게 있겠는가?
내 눈 앞
우울한 책상 위에
놓여진
어머니의 편지.

어머니는 이렇게 쓰신다.
“될 수 있으면 말이다, 얘야,
크리스마스 때
우리한테 내려오려무나.
내게는 목도리를 하나 사주고,
아버지께는 바지를 한 벌 사다오.
집에는
부족한 게 너무 많단다.

네가 시인이라는 거,
좋지 않은 평판만
얻고 있는 거,
난 정말이지 못마땅하다.
차라리 네가 어릴 적부터
뜰로 쟁기나 몰고 다녔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나도 이젠 늙었고
몸도 영 좋지 않단다
........

사랑하는 내 아들아,
대체 네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
그토록 얌전하고,
그토록 순한 아이였는데.
모두들 앞을 다퉈 말하곤 했지.
저 아이 아버지는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네게 품었던 우리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구나.
게다가 더 가슴 아프고
쓰라린 것은,
그나마 네가 시로 버는 돈이
꽤 많을 것이라는
허황한 생각을
네 아버지가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믄
얼마를 벌든 간에,
네가 돈을 집에 보낸 적은 한 번도 없지.
네 시가 그토록 서러운 걸 보면
나도
알겠다,
시인들한텐 돈을 잘 안 주나 보다는 걸.

네가 시인이라는 거,
좋지 않은 평판만
얻고 있는 거,
난 정말이지 못마땅하다.
차라리 네가 어릴 적부터
뜰로 쟁기나 몰고 다녔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요즘은 온통 슬픈 일 투성이다.
암흑 속에서 사는 것만 같구나.
말(馬)도 없단다.
네가 집에만 있었더라면,
지금쯤 우리에겐 모든 게 있을 텐데,
네 머리로
동네 읍장인들 안 됐겠느냐.

그랬더라면 더 당당하게 살았을 텐데,
아무한테도 끌려 다니지 않고,
너 역시나
필요없는 고생은 안했을 텐데,
네 처한테는
실 잣는 일이나 시키고,
너는 아들답게,
우리의 노년을 돌보지 않았겠느냐.”
................
편지를 구겨 버린 나는
우울해진다.
정말이지 내 이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인가?
그러나 내 모든 생각은
나중에 털어놓으련다.
답장에서
털어놓으련다...

그는 정말로 「답장」이란 시를 썼다!



Tracked from http://www.transs.pe.kr/member/jey03.htm

* tirol's thought

연구공간 수유+너머 웹페이지에 갔다가 진은영 시인의 자기 소개 페이지에서 읽었다.
말줄임표가 원문에 있는 것인지 시가 너무 길어서 인용자인 진은영 시인이 임의로 끼워넣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뭐, 사실 아무래도 상관은 없다. 내가 인용의 엄밀성을 요구하는 논문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또한 예세닌을 인용한 시인처럼 아직도 '낡은 혁명적 낭만주의' 감동하고, 늙은 어머니에게 대꾸한다. “왜 이러세요? 내가 뭐 외양간에서 끌어내야 하는 소는 아니잖아요, 말이나 당나귀도 아니구 말이에요.”
시인도 아닌 주제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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