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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472

즐거운 편지 - 황동규 즐거운 편지 황동규 Ⅰ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Ⅱ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현대문학1958/ * tirol's thought 가끔 골짜기에 거세게 퍼붓는 눈을 보면 정녕 그치지 않을 것 처럼 생각될 때도 있지만.. 2005. 3. 4.
저물어가는 강마을에서 - 문태준 저물어가는 강마을에서 문태준 어리숙한 나에게도 어느 때는 당신 생각이 납니다 당신의 눈에서 눈으로 산그림자처럼 옮겨가는 슬픔들 오지항아리처럼 우는 새는 더 큰 항아리인 강이 가둡니다 당신과 나 사이 이곳의 어둠과 저 건너 마을의 어둠 사이에 큰 둥근 바퀴 같은 강이 흐릅니다 강 건너 마을에서 소가 웁니다 찬 강에 는개가 축축하게 젖도록 우는 소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낮 동안 새끼를 이별했거나 잃어버린 사랑이 있었거나 목이 쉬도록 우는 소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우는 소의 희고 둥근 눈망울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리숙한 나에게도 어느 때는 당신 생각이 납니다 * tirol's thought '는개'가 뭔가 하고 찾아봤더니 '안개처럼 부옇게 내리는 가는 비'라고 한다. 는개가 축축하게 젖도록 우는 소의 모습이라.. 2005. 2. 23.
식은 밥 - 함성호 식은 밥 함성호 어머니 밥 잡수신다 시래기국에 찬밥덩이 던져 넣어 후룩후룩 얼른 얼른 젖은 행주처럼 조그맣게 쭈그리고 앉아 목 퀭한 환자복의 아들이 남긴 식은 밥 다아 잡수신다 어머니 마른 가슴으로 먼 하늘 보신다 삭풍에 거슬러 살 날리던, 유리의 땅은 바닷바람 같은 먼 나라 내 목숨 같은 먼 나라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한 계절을 씻어내리는 비 두만강 물소리에 밥 말아 어머니 이른 아침밥 드신다 붉은 흙 퍽퍽 가슴에 채우신다 * tirol's thought 지난 여름, 어머니가 갑작스런 현기증을 호소하셔서 이른 새벽 응급실에 갔던 적이 있다. 그때 서너시간 쯤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바라보던 응급실의 풍경들이 떠오른다. 응급실에 실려오는 환자들은 증세도 다양하다. 어딘가가 부러진 사람, 갑작스런.. 2005. 2. 22.
화살기도 - 이문재 화살기도 이문재 이 어린 것을 당신의 형상대로 일어서게 하소서 내가 쏜살같이 날아가 박힐 것입니다 첩첩 바람의 페이지를 뚫고 중력의 터널 끝까지 달려가 거기 검고 둥근 중심에서 으스러질 것입니다 천 년의 하늘 아래, 부르르 온몸을 떨며 내가 죽어갈 환한 과녁 함께 불붙어 스러질 수직의 당신 나는 저 한 줄 기도문으로 나를 당겨 확, 하고 불붙는 유성(流星)이 될 것입니다 * tirol's thought 제대로 기도를 해 본지가 꽤 오래된 것 같다.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일용할 양식을 앞에 두고, 주일날 교회에 가서, 습관처럼 기도를 하지만, 마음을 다해, 과녁을 향하는 화살, 불붙는 유성처럼 기도를 한 지가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2005. 2. 14.
살구를 따고 - 장석남 살구를 따고 장석남 내 서른여섯살은 그저 초여름이 되기 전에 살구를 한 두어 되 땄다는 것으로 기록해둘 수밖에는 없네. 그것도, 덜어낸 무게 때문에 가뜬히 치켜 올라간 가지 사이의 시들한 이파리들의 팔랑임 사이에다가 기록해둘 수밖에는 없네. 살구나무에 올라 살구를 따며 어쩌면 이 세상에 나와서 내가 가졌던 가장 아름다운, 살구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손아귀를 펴는 내 손길이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나무 위의 저녁을 맞네 더이상 손닿는 데 없어서 더듬어 다른 가지로 옮겨가면서 듣게 되는 이 세상에서는 가장 오래된 듯한, 내 무게로 인한 나뭇가지들의 흐느낌 소리 같은 것은, 어떤 지혜의 말소리는 아닌가 귀담아 들어본다네 살구를 따고 그 이쁘디이쁜 빛깔을 잠시 바라보며 살구씨 속의 아름다운 방을 생각.. 2005. 2. 7.
하관 - 박목월 하관(下棺) 박목월 棺을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兄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 * tirol's thought 우연히 찾은 이 시를 읽다가 월명사의 '제망매가'를 떠올려 본다. 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에 있음에 두려워하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갔는가? 어느.. 2005. 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