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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구두 밑에서 말발굽 소리가 난다 - 손택수

by tirol 2004. 12. 20.
구두 밑에서 말발굽 소리가 난다

손택수


구두 밑에서 따그락 따그락 말발굽 소리가 난다
구두를 벗어 보니 구두 뒷굽에 구멍이 났다
닳을 대로 닳은 구두 뒷굽을
뚫고 들어간 돌멩이들이 부딪히며
걸을 때마다 챙피한 소리를 낸다
바꿔야지, 바꿔야지 작심하고 다닌 게 몇 달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체념하고 다닌 게 또 몇 달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광주로
마산으로, 다시 부산으로 떠돌아다니는 동안
빗물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구두
빙판길에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엄지발가락에 꾸욱 힘을 줘야 했던 구두
걸을 때마다 말발굽 소리를 낸다
빼고 나면 다시 들어가 박히고
빼고 나면 또 다시 들어가 박히는 소리
지친 걸음에 박자를 맞춰주는 소리
닳고 닳은 발굽으로 열 정거장 스무 정거장
빈주머니에 빈손을 감추고 걸어가는 동안
들려오지 않으면 이제는 왠지 허전해진다
그만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이럇
뒷굽을 치며 갈기를 휘갈기는 소리
따그락 따그락 무거운 몸에 리듬을 실어주는 소리


* tirol's thought

세상에 정들 것, 정들지 말아야 할 것이 따로 있겠는가.
때론 구두 뒷굽에 들어간 돌멩이한테도 정 드는 게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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