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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472

노을 무렵 - 김지하 노을 무렵 김지하 눈부신 흰 시루봉 저녁 어여쁜 분홍 노을 내 시린 이마에 타는 노을 행길 저기서 아이들과 함께 공받기 하는 내 속에 담배 피우며 신문 읽고 있는 내 속에 노을 무렵에 되똥거리는 빛나는 재잘거리는 닭, 참새, 붉은 구름, 사철나무 스쳐 지나는 바람, 머언 거리의 노랫소리 노랫소리 속에 나와 함께 공받기 하는 아이들 속에 눈부신 흰 시루봉 저녁 어여쁜 분홍 노을 내 시린 이마에 타는 노을 우리 집에 문득 불켜질 때 나는 다시 혼자다 오늘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자. * tirol's thought 되지도 않는 시를 혼자 끄적거릴 때 내 시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문득'이다. 잘 나가는 것 같다가, '문득' 아무 이상도 없는 것 같다가, '문득' 나는 왜 '문득'의 순간에 집착하는 .. 2005. 1. 20.
이것은 괴로움인가 기쁨인가 - 황동규 이것은 괴로움인가 기쁨인가 황동규 1 내 그처럼 아껴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했던 어린 나무들이 얼어 쓰러졌을 때 나는 그들을 뽑으러 나갔노라. 그날 하늘에선 갑자기 눈이 그쳐 머리 위론 이상히 희고 환한 구름들이 달려가고, 갑자기 오는 망설임, 허나 뒤를 돌아보고 싶지 않은 목, 오 들을 이 없는 고백. 나는 갔었다, 그 후에도 몇 번인가 그 어린 나무들의 자리로. 그런데 어느날 누가 내 젊음에서 날 부르는 소리를 들었노라. 나즉히 나즉히 아직 취하지 않은 술집에서 불러내는 소리를. 날 부르는 자여, 어지러운 꿈마다 희부연한 빛 속에서 만나는 자여, 나와 씨름할 때가 되었는가. 네 나를 꼭 이겨야겠거든 신호를 하여다오. 눈물 담긴 얼굴을 보여다오. 내 조용히 쓰러져 주마. 2 갑자기 많은 눈이 내려 잘 걸.. 2005. 1. 19.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 tirol's thought 이 세상의 눈물의 양엔 변함이 없지. 어디선가 누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면 한쪽에선 눈물을 거두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요. (The tears of the world are a constant quantity. For each one .. 2005. 1. 14.
강 - 구광본 강 구광본 혼자서는 건널 수 없는 것. 오랜 날이 지나서야 알았네. 갈대가 눕고 다시 일어나는 세월, 가을빛에 떠밀려 헤매기만 했네. 한철 깃든 새들이 떠나고 가면 지는 해에도 쓸쓸해지기만 하고 얕은 물에도 휩싸이고 말아 혼자서는 건널 수 없는 것. * tirol's thought 혼자서는 건널 수 없는 것과 혼자서 건너야만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혼자서 건너야만 하는 것들의 목록이다. 삶과 죽음 앞에서, 신 앞에서 우리는 단독자다. 2005. 1. 7.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하네 - 박정대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하네 박정대 나 집시처럼 떠돌다 그대를 만났네 그대는 어느 먼 길을 걸어왔는지 바람이 깎아놓은 먼지조각처럼 길 위에 망연히 서 있었네 내 가슴의 푸른 샘물 한 줌으로 그대 메마른 입술 축여주고 싶었지만 아, 나는 집시처럼 떠돌다 어느 먼 옛날 가슴을 잃어버렸네 가슴 속 푸른 샘물도 내 눈물의 길을 따라 바다로 가버렸다네 나는 이제 너무 낡은 기타 하나만을 가졌네 내 낡은 기타는 서러운 악보만을 기억한다네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 기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면 가응 가응, 나의 기타는 추억의 고양이 소리를 낸다네 떨리는 그 소리의 가여운 밀물로 그대 몸의 먼지들 날려버릴 수만 있다면 이 먼지나는 길 위에서 그대는 한 잎의 푸른 음악으로 다시 돋아날 수도 있으련만 나 집시처럼 떠.. 2004. 12. 29.
삼십세 - 임희구 삼십세 임희구 늦은 밤 라면을 끊이다가 책장의 책들을 살피다가 시집 간 옛 친구를 떠올리다가 오래전 비오던 날 뚝섬에서 옛 친구가 선물한 '삽십세'를 기억해내고 어디에 꽂혀있나 구석구석 찾아보다가 라면이 탱탱 불어터지는 밤 누가 가져갔나 삽십세가 없어졌다 소리도 없이 흔적도 없이 Tracked from http://blog.empas.com/mimaing/5574551 * tirol's thought 늦은 밤 라면을 끓이는 일은 별로 없지만, 나도 책장의 책들을 살피다가 문득 오래전 읽었던 책이 생각나 구석구석 찾아보다가, 소리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 발견하고 마음 한구석이 불어터진 경험이 있다.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삼십세는 서점에 가면 다시 구할 수 있겠지만 나의 삼십세는 어디가서 찾나. 광석이.. 2004. 1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