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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472

길 - 강연호 길 강연호 임의의 한 점에서 다른 점에 이르는 점들의 집합을 선이라 한다 최단거리일 때 직선이라 부른다 수학적 정의는 화두나 잠언과 닮아 있다 때로 법열을 느끼게도 한다 길이란 것도 말하자면 임의의 한 점에서 다른 점에 이르는 점들의 집합이다 최단거리일 때 지름길이라 할 것이다 임의의 한 점에서 다른 점에 이르는 동안 점들은 언제나 고통으로 갈리고 점들은 마냥 슬픔으로 꺾여 있다 수학적으로 볼 때 나는 지금 임의의 한 점 위에서 다른 점을 찾지 못해 우두커니 서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처음의 제 몸을 가르고 꺾을 때마다 망설였을 점들의 고뇌와 번민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다 * tirol's thought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의 '섬')'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 2005. 2. 3.
마징가 계보학 - 권혁웅 마징가 계보학 권혁웅 1. 마징가 Z 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는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 아내가 밤마다 우리 집에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 되면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이팬과 화장품을 창문으로 던졌다 계란 한 판이 금세 없어졌다 2. 그레이트 마징가 어느 날 천하장사가 흠씬 얻어맞았다 아내와 가재를 번갈아 두들겨 패는 소란을 참다못해 옆집 남자가 나섰던 것이다 오방떡을 만들어 파는 사내였는데, 오방떡 만드는 무쇠 틀로 천하장사의 얼굴에 타원형 무늬를 여럿 새겨 넣었다고 한다 오방떡 기계로 계란빵도 만든다 그가 옆집의 계란 사용법을 유감스러워 했.. 2005. 2. 2.
제비집 - 이윤학 제비집 이윤학 제비가 떠난 다음 날 시누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제비집을 헐었다. 흙가루와 함께 알 수 없는 제비가 품다 간 만큼의 먼지와 비듬, 보드랍게 가슴털이 떨어진다. 제비는 어쩌면 떠나기 전에 집을 확인할지 모른다. 마음이 약한 제비는 상처를 생각하겠지. 전기줄에 떼지어 앉아 다수결을 정한 다음 날 버리는 것이 빼앗기는 것보다 어려운 줄 아는 제비떼가, 하늘높이 까맣게 날아간다. [199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 tirol's thought 그렇다. 버리는 것이 빼앗기는 것보다 어렵다. 2005. 2. 1.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물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 tirol's thought 며칠 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았다. 김종삼의 시를 읽으며 나는 영화 속의 '소피'를 떠올린다. 황야의 마녀가 건 저주 때문에 어느날 늙은 노파가 되어버린 소피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자기를 그렇게 만든 마녀를 원망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2005. 1. 28.
요약 - 이갑수 요약 이갑수 모든 일은 시작하는 순간 반으로 요약된다 배부름은 첫술에 요약되어 있다 어떤 술도 그 맛은 첫잔과 마주한 사람이 나누어 좌우한다 귀뚜라미는 소리로서 그 존재를 간단히 요약한다 평행한 햇살을 요약하여 업은 잎사귀 하나 아래로 처지고 있다 방향은 가늘게 요약되어 동쪽은 오로지 동쪽만을 묵묵히 담당한다 요란한 것들을 집합시켜 보면 사소한 것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물질은 한 분자에 성질을 전부 요약하여 담는다 한 방울 바닷물이 바다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서해는 서해를 찾아드는 모든 강의 이름을 요약한다 목숨은 요약되어 한 호흡과 호흡 사이에 있다 파란만장한 생애는 굵고 검은 활자로 요약되어 부음란에 하루 머무른다 하루살이는 일생을 요약하여 하루에 다 산다 너는 모든 남을 요약하여 내게로 왔다 /이.. 2005. 1. 27.
다시 성북역 - 강윤후 다시 성북역 강윤후 종착역에 다가갈수록 열차가 가벼워진다 차창마다 가을 햇살 눈부시게 부대껴 쩔렁거리고 사람들이 버리고 간 신문처럼 나는 의자에 걸터앉아 흘러버린 세월이나 게으르게 뒤적인다 서둘러 지나온 세상의 역들이 귓가에 바삭대고 출입문 위에 붙은 '수도권 전철 노선도'를 천천히 읽어가던 지친 음성, 청량리 회기 휘경 신이문 석계 그리고 성북, 우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그때처럼 나는 아무 대답 못 한 채 고개 돌려 창밖만 바라다본다 어느새 흑백 필름이 되어 스쳐가는 풍경들 나무들은 제 이름표를 떼어내며 스스로 어두워지고 객차는 벌써 텅텅 비어 간간이 울리는 기적 소리가 먼 기억까지 단숨에 되짚어갔다가 돌아오곤 하는데 대숲처럼 마음에 빽빽이 들어찬 세월 비우지 못해 나는 자꾸 무거워진다, 갈 곳 몰.. 2005. 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