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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전염병동에서 - 김혜순

by tirol 2001. 9. 16.
전염병동에서

김혜순


화창한 여름 날
희디흰 방에
네 개의 섬이 조용히
떠 있었읍니다.

그러던 어느 바람
몹시 세던 날
외로운 섬 하나 그만
파도에 묻혀 버렸습니다.
남겨진 섬들이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억울하다 억울하다 말했읍니다.

그리고 또 다음다음 날인가
빛 벌레들이
희디흰 섬의 옷자락에
내려앉던 그날
그만 두 개의 섬도 차례로
파도에 먹혀 버렸읍니다.

이제 홀로 남은 섬 하나는
이불 자락을 입 속 깊이 쑤셔박으며
되돌아 누웠습니다.
홀로 남은 내 발가락 사이로
희디흰 파도들이 찰랑거리며
드나드는 것이 보였읍니다.


문학과 지성사 시인선 17, 김혜순 시집 '또 다른 별에서'/

* tirol's thought

'홀로 남아 이불 자락을 입 속 깊이 쑤셔박으며 되돌아 눕는' 섬 이라는 구절때문에 오랫 동안 기억 속에 남아있던 시. 나도 가끔 이불 자락을 입속 깊이 쑤셔박으며 되돌아 눕고 했었지...마치 모두들 떠나 버리고 홀로 남은 섬처럼. 발가락 사이로 드나드는 희디흰 파도 대신 천장 벽지의 무늬를 헤아리며...
시집 앞을 보니 '1991. 가을. 奎' . 시집 뒤를 보니 1983년에 찍은 초판 2쇄다. 가격은 1500원. 17년 전의 책이구나. 그 동안 문지시선의 가격은 5000원으로 올랐고, '보였읍니다.'에서 '보였습니다.'로 맞춤법 기준이 바뀌었다. 1983.1991.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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