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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나무 - 안도현

by tirol 2004. 8. 26.
나무

안도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시사철 나무가 버티는 것은
귀빰을 폭풍한테 얻어맞으면서
이리저리 머리채를 잡힌 채 전전긍긍하면서도
기어이, 버티는 것은
자기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버티는 것을
이제 막 꼼지락꼼지락 잎을 내밀기 시작하는 어린 나무들에게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훗날 이 세상을 나무의 퍼덕거림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버티는 게 나무의 교육관이다
낮은 곳을 내려다볼 줄 아는 것,
가는 데까지 가보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온 몸으로 가르쳐 주며
나무는 버틴다

나무라고 왜 가지가지 신경통을 모르겠으며
잎사귀마다 서러움으로 울컥일 때가 왜 없었겠는가
죽어버릴 테야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 휘저어 보던 날도 있었을 것이다
트럭을 탄 벌목꾼들이 당도하기 전에
그냥 푹, 고꾸라져도 좋을 것을
죽은 듯이 쓰러져 이미 몸 한 쪽이 썩어가고 있다는 듯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나무라는 듯이 코를 처박고
엎드려 있어도 될 것을 나무는
한사코 서서, 나무는 버틴다
체제에 맞서 제일 잘 버티는 놈이
제일 먼저 눈 밖에 나는 것,
그리하여 나무는
결국은 전 생애를 톱날의 아구같은 이빨에 맡기고 마는데,

여기서 나무의 생은 끝장났다네, 저도 별수 없지, 하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끌려가면서도 나무는 버틴다
버텼기 때문에 나무는 저를 싣고 가는 트럭보다 길다
제재소에서 토막 토막으로 잘리면서 나무는
뎅구르르르 나뒹굴며
이제 신의주까지 기차를 나르는
버팀목이 될 거야, 한다
나무는 버틴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안도현/ 『문학동네』 시인선/


* tirol's thought

아버지가 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제 막 꼼지락꼼지락 잎을 내밀기 시작하는 어린 나무' 같을 아이에게
나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나는 버틸 수 있을 것인가.
'귀뺨을 폭풍한테 얻어맞으며'
'잎사귀마다 서러움으로 울컥이면서도'
나는 한사코 서서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저 버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제재소에서 토막 토막으로 잘리면서도'
'신의주까지 기차를 나르는 버팀목이 될 거야'라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 나무처럼
당당한 아버지가 될 자신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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