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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매미 - 이정록

by tirol 2004. 8. 19.
매미

이정록


여름 내내, 매미는
숲속 가득 전기면도기를 돌린다
철망 밖으로 칼을 내밀지 않고도
날을 돌려 푸른 수염을 깎는다

여름의 끝, 된서리가 몇 차례
땅의 살을 그은 뒤에야
면도를 마치고 나무에서 내려온다

그러나 벌써 겨울이다
살점의 마른 잎 위에
하늘은 다시 비누거품을 풀어놓는다

그 첩첩의 눈 속에는, 언제부턴가
흙에 코드를 꽂고 주름주름 충전을 하는 굼벵이들
봄을 향해 언땅을 흔들고 있다


* tirol's thought

시인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사람이다.
때론 아주 큰 시야로
때론 아주 세밀하게
때론 아주 삐딱하게.

시인은
한여름 매미 소리에서 면도기 소리를 생각해내고
겨울의 눈에서 비누거품을 본다.

시인의 눈은 땅 위에 있지 않다
저 멀리 높은 곳에 있다.

대지의 얼굴을 뒤덮은 눈으로 된 비누거품.
그리고 푸른 숲의 수염을 깍는 매미.
흙에 코드를 꽂고 충전하는 굼벵이들때문에 진동하는 땅.

시인의 상상력이 빚어내는 스케일이 정말 웅장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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