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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472

다시 봄이 왔다 - 이성복 다시 봄이 왔다 이성복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 2019. 3. 21.
다시 한번 - 손월언 다시 한번 손월언 기다림을 위하여 말을 멈추고 사물들을 바라보라 말은 공기 속을 송곳처럼 파고 달려드는 고속 열차와 같이 사물의 정체와 관계에 상처를 입힌 뒤 목적지에 도착한다 착각과 왜곡이라는 두 바퀴에 얹혀 달리는 오래된 현재 기다림은 또다시 말을 위해 있고 우리는 기다림을 위해 있다 tirol's thought 우리는 기다림을 위해 있고 기다림은 말을 위해 있다면 말은 무엇을 위해 있는걸까 '말은...사물의 정체와 관계에 상처를 입힌 뒤 목적지에 도착한다' 라는 구절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우리의 말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오해 위에서 오고가는 편도 열차 같은 게 아닐까 2019. 3. 7.
소쩍새 - 윤제림 소쩍새 윤제림 남이 노래할 땐잠자코 들어주는 거라,끝날 때까지. 소쩍...쩍쩍...소ㅎ쩍...ㅎ쩍...훌쩍... 누군가 울 땐가만있는 거라그칠 때까지. * tirol's thought 소쩍새가 노래를 하는 것인지 울음을 우는 것인지는사람마다 듣기에 따라 다르겠지만(내게는 우는 것으로 들린다.)노래든 울음이든잠자코, 가만이 들어주는 것이참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라는 걸 시를 읽으며 다시 한번 되뇌어본다. 2019. 2. 28.
수인선철도 - 이창기 수인선철도 이창기 그렇게 왔다 가나부다 갈대 북서풍과 청둥오리의 2월 스스로 독을 품게 하던 겨울의, 가난과 갈증의 새벽으로 가는 밤마다 몸서리치며 떨던 바다를 한 광주리씩 머리에 이고 고개 숙인 낙타처럼 또박또박 걷게 하는 하나뿐인 길 떠나는 사람들이 남기고 간 빵과 홀로 남은 여자의 헝클어진 머리같은 그들이 버리고 간 추억이 깨진 소주병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불륜의 끊임없는 바퀴와 익숙한 체중을 못 잊어하는 옥수수밭에서 숨죽여 지켜보는 아이들의 뜨듯한 가랭이 같은 아직도 귀대면 중무장한 병사의 씩씩한 발자국 소리 같은 것이 오래도록 남아서 태업한 꿈 속까지 이어지는 나는 수척한 햇빛에 이리저리 반사되며 얻어터지며 철길 위에 팔 벌려 수평을 잡으며 위태롭게 걷는다 그렇게 왔다 가나부다 70년대 배호.. 2019. 2. 22.
슬퍼할 수 없는 것 - 이성복 슬퍼할 수 없는 것 이성복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 tirol’s thought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이 시를 보았다. 언젠가 읽은 것 같은데 누구의 글인지는 생각 나지 않았다.검색을 해보니 이성복의 시다. 볼 수 있으나 갈 수 없는 것 가질 수 없는 것갈 수 있으나 못 가리라는 것을 아는 것 슬프나 슬퍼할 수 없는 것 살아가는 것과 살아지는 것말이 안되나 말해지는 것 말할 수조차 없는 것이런 것들에 대해 도돌이표만 있고 마침표는 없는 악보를 따라 부르듯이계속해서 생각했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9. 2. 15.
여섯 살배기 덩이가 어느 날 - 박광배 여섯 살배기 덩이가 어느 날 박광배 "아빠 나는 말야,바람하고 얘기한 적 있어." -언제 그랬어? "골목에 나와서 심심할 때." "무섭거나 심심할 때는 말야,바람하고 얘기해." 애비가 얼마나 못났으면자식을 시인으로 만드나. * tirol's thought 시인은 '골목에 나와서 심심할 때' 바람과 얘기를 나눈다는 아이의 말을 들으며 자책한다. 아빠는 일을 하러 나가야만 했던 걸까, 몸이 좋지 않아서 아이와 놀아주지 못한 걸까. 아이의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그래도 시인은 좋은 아빠인 것 같다. '언제 그랬어?'라고 물어보는 아빠니까.우리 아들이 '아빠 나는 말야,/ 바람하고 얘기한 적 있어.'라고 하면 나는 뭐라고 말할까?'뭐라고?' '멋진 말이네' '헐, 이 녀석이'...?'언제 그랬어?' 라고 물어볼.. 2019. 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