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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다시 봄이 왔다 - 이성복

by tirol 2019. 3. 21.

다시 봄이 왔다


이성복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풀잎 아래 엎드려 숨죽이면 가슴엔 윤기나는 石炭層이 깊었다



<이성복,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 tirol's thought


누구나 다 아는 것과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

먼지 낀 낡은 유리창 안 쪽과 바깥 쪽

더디고 나른한 세월과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

습관처럼 이쪽과 저쪽을 맞춰본다


겨울과 여름 사이,

다시 봄이 왔다

한켜의 계절이 쌓이고 

또 한켜의 계절이 그 위에 쌓여간다.

엎드렸다 날뛰다 숨죽이다 아우성치다

그렇게 켜켜이 석탄층처럼 쌓여가는 세월

다시 봄이 왔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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