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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13

농담 - 이문재 농담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 tirol's thought 가끔씩 사소한 문제로 아내와 다툰다. 돌아서 가만히 마음 속을 들여다 보면 미안함과 야속함이 내 속에서 다툰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는 사실쯤은 나도 알고 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안다는 것'과 '산다는 것'이 거리는 얼마나 먼가. 2005. 12. 21.
농업박물관 소식 - 이문재 농업박물관 소식 - 우리 밀 어린싹 이문재 만일 지금 예수가 오신다면 십자가가 아니라 똥짐을 지실 것이라는 권정생 선생의 글을 읽었다 점심 먹으러 갈 때마다 지나다니는 농업박물관 앞뜰에는 원두막에 물레방아까지 돌아간다 원두막 아래 채 다섯 평도 안 되는 밭에 무언가 심어져 있어서 파랬다 우리 밀, 원산지 : 소아시아 이란 파키스탄이라고 쓴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농업박물관 앞뜰 나는 쪼그리고 앉아 우리 밀 어린싹을 하염없이 바라다보았다 농업박물관에 전시된 우리 밀 우리 밀, 내가 지나온 시절 똥짐 지던 그 시절이 미래가 되고 말았다 우리 밀, 아 오래된 미래 나는 울었다 /이문재 시집,『마음의 오지』, 문학동네, 1999./ * tirol's thought 시인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라는.. 2005. 12. 13.
사하촌 - 이문재 사하촌 이문재 편지지가 눅눅해 며칠째 펜이 잘 나가지 않습니다 늦여름 내륙 산간이 광범위하게 젖어 있습니다 인적 희미한 토담집에 알전구 켜놓고 앉았습니다 건너 산에서 건너오는 소쩍새 소리도 축축합니다 울창해진 빗줄기가 메아리의 입을 막아버렸습니다 푸성귀 두어 가지 묵은 된장에 비빈 저녁상을 물리고 폭포 왼쪽에서 끊겼을 임도(林道)를 생각다 말았습니다 와당탕탕 내쳐 달려가는 계곡물이 아니었다면 저 비의 소리 비의 내음 비의 분량이 버거웠을 것입니다 며칠째 하루가 길고 좁아지고 있습니다 필라멘트가 바르르 떠는 자정 부근 젖은 몸을 이기지 못하고 벽지가 저절로 떨어집니다 낡은 신문지 사이에서 1970년대가 갑자기 나타납니다 나는 아직 떠나오지도 떠나가지도 못한 것입니다 열대성 고기압이 물러가지 않는 이곳은 흑.. 2005. 9. 28.
소금창고 - 이문재 소금창고 이문재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 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 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 tirol's thought 스무살 무렵 나에게 '서른 살'이라는 나이는 멀게만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얼른 서른 살이 되고 싶었다. 서른 살이 되면 '뭔가' 되있을 것만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고, 심지어는 아이를 안고.. 2004. 6. 24.
양떼 염소떼 - 이문재 양떼 염소떼 이문재 아주 편안한 걸음으로 해 지는 서편으로 걸어갈 수 있다면 풀피리 소리 잔등이나 이마 쪽에서 천천히 풀어지고 양떼 사이로 흐르는 강을 따라 침엽수 무성한 모래밭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다면 발자국이 아주 오래도록 남아 있어 적은 양의 빗물도 고이게 하고 풀잎들을 물에 지치게 하고 가장 가까운 계곡을 찾아내 스스로 흘러나가게 하고 양떼 염소떼 하늘로 올라가 구름의 형상으로 자라나 저것이 양떼구름이야 염소떼구름이야 하고 지상의 슬픈 민족들이 신기해하거나 즐거워할 수 있다면 나는 양떼 염소떼 수천 마리 이끌고 어떤 종교의 발생지처럼 나는 죽는 곳을 죽을 때까지 가꾸어 놓을 수 있다 /이문재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민음사/ * tirol's thought 오늘, 하늘이 .. 2003. 9. 21.
유전자는 그리워만 할 뿐이다 - 이문재 유전자는 그리워만 할 뿐이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이문재 오늘 하루도 영 정갈하지 못하다 어제는 불길했고 또 그저께는 서툴렀다 가끔 계절이라는 것이 이 도시를 들렀다 간다 신기하 다 나른해 본지도 오랜만이다 피곤으로 단단해지는 퇴 적암들 나이에는 다들 금이 가 있다 비둘기 수백 마리 가 16차선 도로를 가득 메우며 낮게 난다 새들도 도시 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버린 성냥불 때문에 혹은 켜놓고 나온 컴퓨터 때문에 회사가 불타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생 기면 잠이 안 온다 온갖 죽음의 아가리들이 도처에서 입을 딱 벌리고 있 는 게 보인다 퇴근길에도 한 발짝도 떼놓을 수 없을 때가 있다 박모가 살얼음처럼 깔리고 갑자기 내가 아는 이름이 하나도 없어진다 옛날에 배가 자주 고프던 시절에 온 몸을.. 2003. 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