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 읽어주는 남자

유전자는 그리워만 할 뿐이다 - 이문재

by tirol 2003. 1. 6.
유전자는 그리워만 할 뿐이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이문재


오늘 하루도 영 정갈하지 못하다
어제는 불길했고 또 그저께는 서툴렀다
가끔 계절이라는 것이 이 도시를 들렀다 간다 신기하
다 나른해 본지도 오랜만이다 피곤으로 단단해지는 퇴
적암들 나이에는 다들 금이 가 있다 비둘기 수백 마리
가 16차선 도로를 가득 메우며 낮게 난다 새들도 도시
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버린 성냥불 때문에 혹은 켜놓고 나온 컴퓨터
때문에 회사가 불타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생
기면 잠이 안 온다
온갖 죽음의 아가리들이 도처에서 입을 딱 벌리고 있
는 게 보인다 퇴근길에도 한 발짝도 떼놓을 수 없을
때가 있다 박모가 살얼음처럼 깔리고 갑자기 내가 아는
이름이 하나도 없어진다
옛날에 배가 자주 고프던 시절에 온 몸을 활짝 펴고
햇빛 안으로 들어가 누운 적이 있었다 마치 내 몸에 엽
록소가 있다는 듯이 마치 인상파 화가들이 그런 여름날
오전의 야외 식탁 같은 게 차려져 있다는 듯이 말이다
살이 많이 익었었다
시간에게 정갈하고 싶었다 세련되고 싶었다
내 유전자는 그리워하는 정보밖에 가진 게 없다 아
주 가끔 죽음처럼 옛날을 떠올리게 되는 아픈 날이면
유전자들은 모여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먼 반딧불
이 우는 소리 말이다 그럴 때는 살아 있다는 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이문재 시집, 마음의 오지, 문학동네, 1999/


* tirol's thought

새해라서,
조금 밝은 시를 골라보려고 했는데,
그런데 말이다,
결국 잡힌 시가 이거다.
왜 내 그물에는 이런 시만 잡히는거지?
그래도 어쩌겠어...
아무래도 내 유전자는 슬픈 시를 찾아내는 정보밖에 가진 게 없나부다

'시 읽어주는 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은 - 채호기  (0) 2003.01.31
원당 가는 길 - 허수경  (0) 2003.01.18
티롤의 일곱번째 포임레러  (1) 2003.01.02
비가 와도 젖은 者는 - 오규원  (0) 2003.01.01
티롤의 여섯번째 포임레러  (1) 2002.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