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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어주는 남자

사하촌 - 이문재

by tirol 2005. 9. 28.
사하촌

이문재


편지지가 눅눅해 며칠째 펜이 잘 나가지 않습니다
늦여름 내륙 산간이 광범위하게 젖어 있습니다
인적 희미한 토담집에 알전구 켜놓고 앉았습니다
건너 산에서 건너오는 소쩍새 소리도 축축합니다

울창해진 빗줄기가 메아리의 입을 막아버렸습니다
푸성귀 두어 가지 묵은 된장에 비빈 저녁상을 물리고
폭포 왼쪽에서 끊겼을 임도(林道)를 생각다 말았습니다
와당탕탕 내쳐 달려가는 계곡물이 아니었다면
저 비의 소리 비의 내음 비의 분량이 버거웠을 것입니다
며칠째 하루가 길고 좁아지고 있습니다

필라멘트가 바르르 떠는 자정 부근
젖은 몸을 이기지 못하고 벽지가 저절로 떨어집니다
낡은 신문지 사이에서 1970년대가 갑자기 나타납니다
나는 아직 떠나오지도 떠나가지도 못한 것입니다
열대성 고기압이 물러가지 않는 이곳은 흑야
언제쯤 혼자 맞는 아침이 말끔해질 수 있을지
언제쯤 헛헛한 꿈자리를 단정하게 개놓을 수 있을지

돌진하듯이 일주문을 통과하거나
아니면 아예 내려가겠다는 결부좌가
이렇게 불어터져 있습니다

/이문재 시집, 제국호텔, 문학동네, 2004/


* tirol's thought

'아직 떠나오지도 떠나가지도 못한' 이가 어디 시 속의 화자 뿐일까.
너무도 비슷한 하루 하루의 삶이 익숙하다 못해 기계의 반복적인 동작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습관처럼 움직이는 이 몸뚱아리말고 내 속의 또 다른 내가 지난 세월 어디쯤에선가 멈춰있는 건 아닌가 하는 공상을 해 보기도 한다. 그 어딘가에서 '떠나오지도 떠나가지도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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